꿈이나 장래희망 같은 게 전혀 없던 학창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떠올려보니 매년마다 장래희망에 적힌 직업은 달라졌던 것 같네요. 평탄치 않았던 가정환경에 안정감을 가져다준 것도, 미래에 막연한 불안감을 쉽게 잠재워주던 것도 공부와 성적이라는 걸 이른 나이에 깨달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대생이 되어 수많은 시험을 보고, 가운을 입고 실습을 하며 졸업을 앞두고 국가고시를 보던 날까지 제 안은 오히려 점점 비어갔던 것 같아요. 친구들은 내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각자 의대에 진학하기 전부터 혹은 의대에 다니며 생긴 꿈을 향해 진로를 정해 나아가는데, 저는 도대체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더군요. 더 큰 곳에 가서 많은 것을 경험하면 뭔가 달라질까?라는 어린 생각에 서울에 큰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마쳤지만, 결국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 기대에 당시 인기과 중 하나였던 성형외과에 지원했던 저는 경쟁에서 떨어져 첫 실패를 맛보게 되었죠. 가만 보면 너무 평탄했던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늦은 나이에 생긴 겨우 한 번의 실패였지만, 주변 친구들이 저마다 정한 길을 향해 멋지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어요. 군의관이 되어 생긴 3년의 시간. 나를 잃어버린 느낌에 방황하던 중, 제가 스스로에게 던진 첫 질문은 ‘너는 대체 뭘 좋아하니?’였던 것 같습니다. 잘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봐서 인정받고 만족감을 느끼던 익숙한 그것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설명해 줄 무언가. 텅 빈 것만 같던 제게도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더군요. 관사로 이사를 오며 혹시 몰라 챙겨 온 낡은 스케치북. 많지는 않지만 학생 시절부터 1년에 두세 번, 정말 가끔 낙서처럼 그려둔 그림들. 인물화를 좋아했던 터라, 비율과 형태가 잘 맞지 않는 서툰 그림들이 다시 낯선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배워본 적 없는 그림이었지만, 그저 그리는 것이 재밌었고 쌓여가는 그림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채워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온라인 클래스를 통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연필, 펜, 색연필을 이용한 그림부터 디지털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그림을 쌓아갔어요. 군복무를 하던 지역에 작은 화실을 다니기도 하며 그렇게 매일같이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서툰 제 그림에 스스로 위축되어 자신감을 잃던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면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들이 다시 그림에 색을 입혀주듯 저를 응원해 줬던 것 같아요. 쓸데없이 서론이 길었지만, 그렇게 오늘까지 그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다음번 이야기는 그림일기를 그려보려 합니다. 대단하고 특별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