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 8년 차.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인력시장에서 경력단절여성이라고 불린다.
결혼식을 앞둔 며칠 전 다니던 회사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땐 계약직이라 다행이다 생각했다.
결혼을 이유로 회사에 연차를 며칠씩 몰아 쓸 필요도 없고
깔끔하게 계약만료로 그만두게 되니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고
그땐 얼마든지 다시 취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아이를 빨리 갖게 되었고
나는 어리석게도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나의 커리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한 1년 정도? 아이를 키우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돌이 되지도 않은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냈지만 나는 일 할 수 없었다.
시댁도 친정도 육아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는 나는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곳이 어린이 집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린이 집은 언제나 날 도울 수 없다는 걸
직접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낸 후에야 알 게 되었다.
어린이 집은 아픈 아이를 받아줄 수 없다. 특히 열이 나면 그렇다.
수족구, 독감, 구내염 등 온갖 전염병은 다 얻어오는 데
아이가 아프면 짧게는 3~4일 길게는 일주일이 넘게도 가정 보육을 해야 했다.
첫째 아이가 수족구를 연달아 3번 걸렸을 때
한 달에 겨우 어린이 집에 보낸 날짜가 손에 꼽혔던 그때
나는 포기했다. 이 어린아이를 기르면서 회사를 다닐 수는 없겠구나.
어떤 회사가 아이가 아프다고 3주 이상을 결근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
머리로는 딱 접었는데
마음으로는 그렇지 못했나 보다.
나는 가끔 밤에 자다가
헛헛해 침대에서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나는 나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지
내 꿈은 뭐였지
나는 뭘 잘했던 사람이었지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했고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20살이 된 이후부터 결혼 전까지 끊임없이 일을 했다.
대학을 다닐 때는 늘 알바를 했다.
400만 원이 넘는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려고 한 학기를, 한 계절의 방학을 꼬박 알바로 채웠다.
어떨 때는 내가 공부를 하려고 일을 하는 건지, 일을 하다가 잠깐 공부를 하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꿈이 명확하고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던 나는
취직도 빠른 편이었다.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이동할 때 말고는 쉬지 않고 일했다.
한 달을 벌어 다음 한 달을 살았던 나는
한 달을 통째로 쉴 수 없었다. 그럼 다음 달을 살아낼 수 없었기에
대학 졸업 후 7년 넘게 거의 쉰 적이 없이 일을 했다.
그렇게나 일을 했던 나인데
일한 만큼 꼬박 그만큼을 쉬고 있다.
사실 쉬고 있다고 하면 너무 억울하다.
일할 때만큼이나 바쁘게 살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회사를 다니는 것만큼이나 고단하고 힘든 일이다
다만 돈을 못 벌뿐이다.
아니다.
다만 돈을 못 버는 건 줄 알았는데
나의 30대가 날아가 버렸다.
뭐든 할 수 있다고
하면 누구보다 잘한다고
자부하던 나는 이제 없다.
뭔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던 30대는 이미 가버렸고
40대에 들어서버린 지금
내가 다시 일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말한다.
덕분에 자라나는 아이를 옆에서 볼 수 있지 않았냐고
크는 아이를 지켜볼 수 있는 행복을 누리지 않았냐고
사회생활하면서 인간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는 없지 않았냐고
바득바득 돈도 벌면서 육아까지 한 거 아니지 않냐고
맞다. 그랬지.
일하다가 밤에 들어와 잠든 아이의 얼굴만 보는 남편과 다르게
나는 아이의 모든 순간을 함께 했지. 덕분에 행복했지.
육아를 한다는 이유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남편에게 떠 넘길 수 있었지
덕분에 지옥 같은 출퇴근 길도, 나랑 맞지 않는 사람과의 마찰도 피할 수 있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서글플까.
더 늦지 않게 나도 사회에서 한몫을 하는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은 아직도 욕심일까?
오늘의 수다거리
아이가 몇 살 되었을 때 다시 일하기 시작하셨어요?
경력단절 기간 동안 자신을 위해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워킹맘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