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안전기 같은 이웃

by 장미

아끼는 유리그릇을 그것도 여닫이문 홈에 떨어뜨려 깨뜨리질 않나, 핸드폰 요금이 세 배 이상 나오질 않나, 하다못해 고춧가루며 마늘과 간장에 이르기까지 덜어놓고 쓰는 양념통들마저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 와중에 무엇보다 마음에 울림을 주던 이웃의 메아리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 내내 마음이 쓰이는 중이었다.

겨울 끝과 봄을 이어주는 얼었던 고리가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요즘 내 마음도 어느 정도는 산란해진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유리그릇을 깨뜨린 건 행운이다. 코로나19 확산세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얼굴 못 본 지 몇 개월이 지난 아이들이 무탈하다는 신호다. 다시 일을 시작한 남편의 건강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유리그릇이 가족들 대신 아픈 것이다. 바닥을 드러낸 몇 가지 양념통들은 자신들을 채워주면 된다고 몸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금파였던 대파 가격이 확 빠졌다. 초겨울 화분에 묻어두고 뽑아 먹던 대파도 끝물이다. 한 단 사다 다듬어 씻고 잘라 냉동실에 갈무리하고 돌아서는데 천정 등 두 개 중 하나가 깜박거렸다. 며칠 간의 산란이 한순간에 끝나지는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디 여기서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깜박거리는 형광등을 뽑아들고 마트에 들렀다. 뽑아들고 간 형광등과 같은 사이즈 두 개가 묶인 형광등을 사들고 왔다.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다 직접 갈아 끼우기로 했다. 새 형광등을 꽂아도 깜박거린다. 다른 새 형광등도 꽂아보아도 여전하다. 다시 마트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고객센터 직원이 시험용 기구에 형광등을 끼우니 두 개 모두 멀쩡하다.

"아마 댁의 안전기가 문제인 것 같은데요."

집으로 돌아와 관리소에 전화했다. 안전기 문제라며 안전기 구입 후 전화하면 바로 와서 교체해 주겠다는 답변이다. 다행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안전기 사 오십사 부탁을 하려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등 두 개 중 한 개가 기능을 못하니 주방이 굴 속처럼 느껴졌다. 뒤늦게 귀가한 남편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예예. 그럼 내일 저녁에 뵙죠."

그리고 그 내일 저녁, 남편과 통화했던 사람이 남편과 함께 왔다. 전기 기술자이며 우리 동 바로 위층에 사는 이웃이란다. 남편과 서로 무엇이 고마운지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기존 사용 중이던 것이 아닌 본인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교체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감사히 받아들일 일이다. 뚝딱뚝딱, 드르르르 몇 번에 전등을 교체했다. 전등 두 개를 쓰던 때보다 몇 배 더 밝아 보인다. 떼어낸 등갓과 내가 사 온 형광등은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쓰라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아, 저 엄청 깔끔해져야겠는걸요.티끌이 다 보일 듯해요. 감사드려요."

"그렇죠. 하지만 지금 무지 밝아 보여도 사용하시다 보면 금세 전과 같아져요. 언제든 도울 일 있으면 오겠습니다."




호롱불에서 촛불로, 촛불에서 남포(램프)로 백열등으로 형광등으로 LED로 발전한 조명의 역사를 나도 꿰뚫으며 살아왔다. 그때마다 느끼곤 했다. 더 밝은 조명을 쓰기 시작하는 초기에는 새 조명이 기존의 것에 비해 마치 딴 세상처럼 밝아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은 그것에 이내 익숙해지곤 했다. 더 밝은 것으로 바꾼 후에도 늘 그랬다.

남편이 함께 식사하기를 권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직장에 다니는 부인의 귀가 시간이 되었으니 가서 저녁 준비를 하겠다는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었다.

"담배 친구야. 친구가 늘었네. 4층 담배 친구가 저 친구한테 전기 부품 수리받았대서 나도 연락해 봤어요."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전기기사는 세 살 많은 남편을 깍듯이 형님이라 불렀다. 나 사는 모습이 소꿉놀이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여보와 당신 둘은 지나치게 단출해 심란한 일 끝에 안전기까지 나갔었나 보다. 좋은 것 있으면 나누고 힘들 땐 서로 도우며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까까머리 시절 잊지 말고 살라고 안전기 같은 이웃을 보내셨나 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며칠간 걱정스럽고 혼란스러웠던 머리와 가슴이 환해졌다.


누구에게 나는 안전기 같은 사람으로 살고있는지 가끔은 확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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