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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 여자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젊어서 가끔 들었던 말 중에 '천상 여자'란 말이 있다. 그리 달갑지 않은 단어의 조합이기도 했다. '천상'이란 단어도 '여자'란 단어도 굳이 사전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단어였다.


둘레길을 가다 이웃을 만났다. 오래전 동네 일을 할 때 함께 활동했던 이웃 동 주민이었다. 둘레길 몇 바퀴 걸어 공원으로 들려는 내 손을 잡은 그녀가 반가운 듯 말을 걸어왔다. 깊숙이 눌러쓴 진회색 겨울 뜨개 모자와 검은색 마스크로 인해 말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여전히 모르는 척 지나칠 뻔했다. 다행이었는지 나는 겨울에도 모자를 거의 쓰지 않기에 상대방의 눈에 어느 정도는 낯이 익었던 모양이다.


"아이고, 우짜믄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어요."

"네, 잘 지내셨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 보여서 이사 가셨나 했지.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요즘은 통 볼 수 없고."

"많이 아팠고 괜찮아지면 일도 좀 했고 그랬어요."

"천상 여자가 따로 없네."

"무슨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내게는 민망한 일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가끔 아는 체를 하고 싶은데 돌아보면 몇 발자국 저만치 가 있더라고. 그래서 오늘은 여서 지키고 있었다니까. 눈매도 그대로고 살도 안 찌고 자세도 하나도 안 변했어. 옛날에도 깔끔한 성격이었는데 본래 성격이 어디 가겠어요? 반갑다 반가워. 우리 집에도 좀 놀러 오고 그래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발아들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보다 열 살 아래인 나를 막냇동생처럼 좋게 봐온 결과일 테고 나는 나보다 열 살 많은 그녀를 말 그대로 열 살이나 많은 여성쯤으로 치부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늘 말이 없었고 그녀는 앞에 나서서 이런저런 참견을 마다하지 않은 점이 더 큰 이유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으로 새겨져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내 손을 꽉 잡은 그녀의 손 안에서 나는 꼼지락거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대놓고 손을 뺄 수 없다는 것을 과거 내 모습을 돌아보는 순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반가워할 정도로 나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나는 참 모순 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때 나는 사실 이랬어요'라고 그녀의 너그러운 마음과 말에 침을 놓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둘레길을 벗어나 공원까지 두 시간을 걸었다. 과거 나와 그녀를 포함한 열 사람의 면면들이 환하게 스쳐갔다. 나이가 어려도 언제나 앞장을 서야 직성이 풀리던 젊은 친구와 덩치만 크고 직언할 줄 모르던 사람과 같은 말을 앞뒤 다르게 하던 내 또래와 서너 살 위였지만 한 번도 내게 언니 소리를 듣지 못했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떠들고 있었다.


왜 그리 삶을 이분법적으로 보았을까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서너 살씩이나 많으면 당연히 언니라고 불렀어야 한다. 지금은 새파란 여자에게도 딱히 알맞은 호칭이 떠오르지 않으면 언니라고 부르는데 말이다. 덩치가 크다고 모두가 직언을 한다면 인간사 덩치 큰 사람들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어디든 나이 어린 골목대장은 있는 법이 아닌가 말이다.


입춘 추위가 내 마음의 뼛속까지 파고들듯 차가웠다. 우거진 채 누렇게 서서 마르는 수크령들이 여전히 키재기를 하고 있는 계단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동네 자질구레한 일을 보던 이들의 면면이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노을 물든 하늘처럼 곱게 보인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도 언젠가는 겨울의 차가움은 내려놓고 아름다운 모습만 남을 것이다. 지나간 것은 추억의 뼈까지도 그러할 것이다.





'천상 여자'에 대해 처음으로 사전의 도움을 받아 보았다.



천상1 (天常) [부사] → 천생.


천생1 (天生) [부사]

1. 타고난 것처럼 아주.

2. 이미 정하여진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여자2 (女子) [명사]여자 : 1.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

2. 여자다운 여자.

3. 한 남자의 아내나 애인을 이르는 말.






사전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천상 여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생리적으로 여성이어서 한 남자의 아내요 두 딸을 낳은 여성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별로 여자답지도 않거니와 때로 생각도 말도 거칠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상처도 곧잘 준다.


이쯤에서 시인 오규원님의 '한 잎의 여자'가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女子), 그 한 잎의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여자(女子)만을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女子), 눈물 같은 여자(女子), 슬픔 같은 여자(女子), 병신(病身) 같은 여자(女子), 시집(詩集) 같은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女子), 그래서 불행한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女子).



시는 좋아하지만 내가 이 시 속의 여자가 되는 일은 극구 사양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그저 다만 다른 아무 첨가 없이 한 인간이면 족하던 시절이었다. 나를 세분하지 않기를 바랐던 시절이었다. 나를 세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고 주문하지 못했다. 그런 주문은 늘 내 안에 머물 뿐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 천성이 어디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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