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 탐방 후 담장옆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영천시장 앞에서 내렸다. 독립문까지 도보 5분 거리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한 구역에 독립문, 송재 서재필 선생 상, 서대문 형무소,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이 있다.
서대문 독립 축제
마침 2023년 서대문 독립축제 기간이었다. 주제가 광복의 기쁨이다. 저녁 시간대 독립문 중심으로 패션쇼, 가수들이 출연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왕과 왕비 분장자등 출연진들이 맹렬히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패션모델들의 활기찬 당당한 걸음걸이에서 대한민국의 역동성과 희망을 보았다. 특히 보행 무대 마지막 꼭짓점에서, 잠시 멋진 포즈를 취한 후, 유턴할 때 짜릿한 감동이 밀려왔다. 광복은 그렇게 왔다.
독립문 정면/ 측면
독립문/ 영은문 설명판
1. 독립문(獨立門)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고종의 동의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서 세웠다.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의 1896년 6월 20일 자 국문본 논설에서 독립문 창건의 취지를 처음 본격적으로 제안하였다. 독립문 설립목적은 "나라에 권리와 명예와 영광과 위엄을 생각하고 더 튼튼히 길러 후생들이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서재필이 기본 스케치를 했고,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했으며, 건축가 심의석이 시공을 담당했다. 1896년에 발의 모금 시작해서 1897년 11월 20일 완공했다. 크기는 높이 14.28m 너비 11.48m이다. 45cm*30cm 크기의 화강석 1,850개를 쌓아 만들었다.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 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세운 기념물이다. 즉, 처음에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이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독립'이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에서도 존속되었던 이유는 '일제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 주었다'며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일제로부터의 독립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굳어졌다. 예로 독립군가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라는 가사처럼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광복 이후 독립협회의 회원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했다. 일 예로 1954년부터 사용된 대한민국의 100 환 지폐의 뒷면에는 독립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송재 서재필 선생 상 / 독립 신문
2. 송재 서재필(徐載弼) 선생
독립공원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 정문으로 가는 도중에 서재필 박사의 동상이 서 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독립신문이라고 한다. 구한말 개화운동가이자 갑신정변의 주동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사(1864년-1951년, 미국명 필립 제이슨, Phlip Jason)다. 서재필 선생의 일대기는 조선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한 편의 역사 드라마와 같다.
서재필 선생은 외가인 전라도 보성에서 출생했다. 충청도 논산에서 일곱 살 때 상경하여, 종로 북촌에 사는 외삼촌 이조참의 김성근의 집에서 성장했다. 북촌에 살던 개혁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에 접했다. 188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1882년 임오군란 후 1883년 일본 도야마 군사학교에 유학하여 근대 군사교육을 이수하였다. 1884년 귀국해 사관학교 설립을 건의하고 국왕의 승인하에 그 책임자가 되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일본 도야마 군사학교 출신 생도들과 함께 왕의 호위와 수구파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하고, 다시 자객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 사이에 가족은 역적으로 연루되어 부모와 형 아내는 연좌제에 의거 사형 혹은 음독자살하고, 동생 서재창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도 돌봐 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미국에서 주경야독하며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893년 미국 의사가 되었고, 1894년 백인여성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하여 미국 주류사회에 합류했다.
망명 10년 10개월 만인 1895년 말에 백인 부인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갑오경장 후 개화파는 전부 사면되었다. 박영효의 요청으로 개혁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삼족 몰살의 끔찍한 고통을 겪고 난 후 조선에 대한 저주와, 애국심 사이에서 그는 고뇌했다. 민비시해사건, 단발령, 아관파천 등으로 극심한 혼란기였다. 미국인으로 통용되었다. 제삼 지대에서 여론을 주도하고 민심을 끌고 나가는 근대신문을 창설하기로 했다. 정부의 재정 지원하에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3개월 뒤에는 서재필 선생은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고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1896년 11월 21일 속국의 상징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내고 독립문(獨立門) 착공했다. 서재필 선생의 자서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국에 돌아와서 보니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영은문이었다. 이 더러운 상징, 부끄러운 이 문을 없애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워야 한다" 1897년 5월에는 중국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만들고 독립공원을 열었다.
미국에서 혈혈단신 자수성가의 과정을 거치며 매우 강한 성격의 인물로 변신했다. 서재필 선생은 고종 임금 앞에 나설 때에도 "신(臣)"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고종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조선 사람을 대할 때 "You Koreans! (너희들 조선 사람들!)"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일찍 서구화된 그의 행태와 가족이 몰살된 트라우마가 겹쳐 조선의 전통윤리와 충돌을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독립신문은 서구를 이상향으로 보고, 국민을 계몽하고 나라를 개화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고종의 조속한 환궁, 러시아의 부산 영도(절영도) 조차요구 철폐, 경인철도 부설권의 미국양도 반대를 주장하였다. 결국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다.
1898년 4월 30일 숭례문(남대문) 앞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승만이 주도한 이 집회는 미국으로 떠나려는 서재필의 잔류를 요청하기 위한 집회였다. 그러나 1898년 5월 14일 부인 암스트롱과 딸과 함께 용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인천으로 가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미국 망명길이다.
미국 입국하여 필라델피아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전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자금으로 출연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상해임시정부가 설치되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고 영문으로 발행되는 "더 인디펜던트"를 간행하여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였다.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의사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미 군정이 실시되자 1947년에 군정청의 고문관으로 두 번째 귀국한다. 독립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군이었으나 고령(81세, 이승만은 73세)이 문제였다. 성격이 강하고 직선적이어서 정당과의 협조가 어려웠다. 결국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세 번째 미국행이 마지막이었다. 1951년 필라델피아에서 84세로 영면하였다. 1994년에 그의 유해를 옮겨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다. 세 번째 귀국이 그의 영원한 귀국이었다.
서대문 형무소 배치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입구
3. 서대문형무소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 년 동안 우리 근 · 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기관이었다.
애국지사를 투옥하기 위해 1907년 감옥을 지어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여 평 정도의 부속시설로 수용인원은 500명 정도였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방 후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 후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1992년 8월 15일에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으나 현재는 보존가치를 고려해 7개 동만을 보존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선 애국지사들을 가두던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분들의 발자취를 밟고 그 넋을 기릴 수 있는 좋은 체험장소이다. 전체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대문형무소 홈페이지 참조)
전시관 1F
① 정보검색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검색하여 볼 수 있다.
② 형무소역사실:
서대문형무소의 변화과정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운용실태, 해방 이후 독재정권의 민주화 인사 탄압실태를 전시하고, 관련기록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③ 영상실: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와 그 의 미를 영상으로 상영하고 있다.
전시관 2F
① 민족저항실 1:
대한제국 말기부터 1919년까지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 실상을 전시하고 있다.
② 민족저항실 2:
독립운동가들의 수감자료인 수형기록표를 전시하여 그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추모의 공간이다.
③ 민족저항실 3:
3.1 독립만세운동 이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독립운동과 사형장 지하 시신수습실 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며 서대문형무소 수감 독립운동가 자료를 검색할 수 있다.
지하 1F
① 지하고문실:
일제강점기 보안과 청사의 지하 취조실로 독립운동가의 취조 과정에서 자행되었던 각종 고문의 실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생존독립운동가의 육성 증언을 통해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중앙사, 옥사, 공작사
① 중앙사:
제10,11,12 옥사와 연결되어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였던 1920년대 건물원형이다.
옥사 2층 복도
패통 (감방내부 위급상황을 간수에게 알리기 위한 도구)
독방(1평도 안되는 좁은 공간)
먹방(2.4m2 넓이의 먹처럼 캄캄한 징벌 방, 12옥사안에 3개의 방이 있었다)
타벽통보법(감방과 감방 사이의 벽을 두드려 정보를 교환하던 암호 통신)
② 옥사: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건물이다.
공작사(공장) / 한센병사
③ 공작사:
형무소 내에서 수감자들이 노역하였던 1920년대 공장건물이다.
취사장(전시실, 뮤지엄샵)
① 취사장:
수감자들의 식사를 위해 밥을 지었던 건물로, 1920년대 지어졌다가 1988년 철거되었던 것을 2010년 복원하였다. 내부에는 취사장 복원당시 발굴되었던 기관실 유구터와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각종기념품 전시, 판매하고 있다.
사형장 시구문
사형장 / 통곡의 미루나무(사형장 입구에 서 있었음. 현재는 태풍으로 쓰러져 있음, 마지막 가는 길에 사형수가 이 나무를 부여 잡고 통곡을 하였다고 전해 진다)
① 사형장
사형을 집행하였던 건물원형(1923년 건립).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시구문
② 시구문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사형시킨 후, 외부에 그 사실을 은폐하고자 시신을 바깥으로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뚫어 놓았던 비밀통로다.
격벽장, 여성옥사
격벽장
① 격벽장:
수감자 상호 간에 대화를 방지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칸막이벽을 만들어, 각 칸에 수감자들을 분리 수용하여 운동을 시켰던 운동시설이다.
유관순 열사
여옥사 지하공간 / 여옥사
② 여성옥사: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였던 장소로 1918년 전후 지어져 해방 이후 1979년까지 사용되었다.
독립관
4. 독립관
조선시대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897년 5월에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건물을 고쳤다. 황태자(순종)는 '독립관'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하였다.
독립관은 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자주독립·민족문화 선양·이권양여 반대·자유언론 신장·신교육 진흥·산업개발 등을 주제로 1898년 말까지 매주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자주·민권·자강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시민대중을 계몽하는 집회장으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독립관의 원래 위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나, 현재 위치에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1층은 순국선열들의 위패(位牌) 봉안실, 지하는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5. 순국선열추념탑
순국선열추념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을 추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추념탑의 중앙에는 태극기를 음양각 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었으며, 태극기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
3.1 독립선언 기념탑 / 유관순 열사
추념탑의 좌우 40m에는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바로 아래에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烈追念塔記)가 새겨져 있다.
순국선열추념탑기에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의지와 끊임없이 계속된 항일 투쟁사를 기록하고 있어 순국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며 원혼을 추모하기 위한 장소로 조성하였다.
윤봉길 의사 / 안중근 의사
추념탑 좌측 부조(浮彫)에는 항일의병 무장상, 윤봉길·이봉창의사 상징상,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 열사 만세운동상이 있다. 추념탑 우측 부조(浮彫)에는 3·1 독립만세상, 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 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