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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N 남산타워,팔각정,봉수대,한양도성유적관

서울 남산 탐방

by 애바다

남산 탐방은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특히 소나무가 보고 싶었다. 애국가 2절의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의 '저 소나무'를 꼭 보고 싶었다.

남산과 관련된 옛날 기억으로는 남산 1호 터널 통과할 때는 동전을 하마 입 같은 동전 투입구에 쨍그랑 던져 넣어야, 통행 차단기 팔이 위로 착하고 올라갔다. 톨게이트 입구 우측에 정보기관의 육중한 검은 철문과 울타리가 있었다. 첫 직장이 비교적 가까운데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사느라 바빴고 무심했었다. 그때는 남산이 나를 자꾸 불렀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의 짝 사랑 남산

세월이 흘러 해외 출입국 때 올림픽대로를 지나가다 보면 어김없이 눈길을 끄는 남산타워가 보였다. 리무진 버스 타고 지날 때마다 몇 번이나 사진을 찍어 댔다. 남산과 밀당을 하다가 결국 내가 스토킹 수준의 짝사랑에 빠진 꼴이 되었다. 모방송국 저녁 9시 뉴스는 남산타워에서 전파가 휘돌아 치며 나오는 영상으로 시작했다. 한 때 세상 모든 뉴스는 남산타워 꼭대기에서 나왔다.


그런 남산타워를 오늘(2023.02.04. 토. 입춘) 처음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마침 친구들과 저녁 모임이 있었다. 당초 목표는 소나무 보기, 남산타워 꼭대기 올라가 보기, 남산케이블카 타보기였다. 남산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작년 말경 ‘덕수궁 돌담길 이야기’에서 못 돌아본 돌담길 밖의 중명전과 고종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미세먼지가 심해 시야가 흐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한강이 겨우 흐릿하게 보일정도였다. 케이블카 탑승을 포기하였다. 게다가 타워도 엘리베이터 수리(2월 1일~10일) 차 운행정지 중이었다. 한강진역에서 고종의 길까지 전 구간을 두 발 도보로 이동하였다.


약 2만 5 천보, 직선거리 5km, 5시간 탐방하였다. 영하 3도~7도 정도의 겨울 흐린 날씨였다. 여행은 역시 도보 여행이 제격이다. 구석구석 곳곳에 숨겨져 있는 생생한 역사현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올랐던 남산이 전국팔도 소나무 단지, 한양도성 남산성곽(특히 성돌 각자 성석 유구), 봉수대를 보고 숙연해졌다. 한양도성 터를 훼손하고 세웠었다는 조선신궁 터를 보았을 때는 나라 잃은 서러움과 울분이 치솟았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김구선생 동상을 둘러보았을 때는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귀중함을 몸소 느꼈다. 중명전과 고종의 길을 둘러보았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의무감, 국가, 조국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시간을 되돌려 보는 역사탐방 회고 반성의 시간이 되었다.


오늘 탐방코스는 아래와 같다.

1. 남산

한강진역->그랜드하얏트/라틴아메리카공원->팔도소나무단지(정이품송 맏아들 나무 장자목)->남산공원유아 숲체험장->수생식물원->한양도성->남산/남산서울타워->남산팔각정->남산봉수대->남산케이블카 매표소 옆->남산공원길->한양도성유적전시관->

2. 안중근의사기념관->백범광장(백범김구상/이 시영선생상/김유신장군상)->숭례문(남대문)->

3. 덕수궁 돌담길->중명전->고종의 길


1. 남산(南山)

한양 내사산(內四山)인 남산(270m) 북악산(北岳 342m) 낙산(駱山 124m) 인왕산(仁旺山 339m) 능선을 따라 평지, 산지 및 구릉지를 연결하여 18.6km의 한양도성을 구축했다. 조선 태조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남산은 풍수지리설상으로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지금도 성곽 13.7km가 남아 있다.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교통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순환도로가 만들어졌고, 1·2·3호 터널을 뚫었다.

남산 둘레길 / 남산 가는 길


1) 한강진역

오전 10시경 6호선 한강진역 1번 출구로 나왔다. 남산 둘레길 안내 간판과 표지판 그리고 지도앱을 참고하며 계단을 밟고 남산타워 방향으로 계속 올라갔다. 첫 길이라 모든 주위 환경이 생소하였다.

남산 공원과 연결된 육교 / 라틴 아메리카 공원

2) 그랜드하얏트/라틴아메리카공원

숲 속의 흙길을 따라 올라갔다. 주민들이 게이트볼 게임을 하는 생활체육 시설을 거쳐 그랜드 하얏트 호텔입구를 지났다. 라틴아메리카 공원에서 남산 공원과 연결된 육교를 건넜다. 가벼운 산책 운동차림의 주민들이 가끔 보였다.

팔도 소나무 단지


정이품송 맏아들 나무 / 한국의 대표 노송(100년 후)

3) 팔도소나무단지(정이품송 맏아들 나무 장자목)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소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세월의 흐름 혹은 일제의 의도적인 식수 계획에 따라 소나무보다 아카시아 나무 등 잡목이 더 많이 보였다. 우연히 '팔도 소나무단지' 안내 표지판을 보았다. 각 지자체에서 직접 식재한 소나무 단지가 있어 반가운 마음에 우측으로 이동하였다. 오늘은 가장 한국적인 소나무 한그루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특히 속리산의 정이품송 맏아들나무(長子木)가 눈에 띄었다. 소나무는 한국인 정서에 잘 맞고 언제 보아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 결국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소나무는 남산타워 약 300m 전 한양성곽의 성돌 각자 성석 유구(축성 공사를 담당했던 군부대, 지역, 담당자, 일시를 새겨 기록한 성돌) 앞의 아직 어리고 작지만 휘어진 소나무와 정이품송 장자목이었다. 장차 세월이 흐르면 멋진 한국의 대표적 노송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한남 유아숲 체험원

4) 남산공원 유아숲체험장

3월 봄이 되면 노란 병아리 삐약삐약 같은 6세 미만 유아들이 놀이터를 누빌 것이다. '어린이집 가기 싫어! 너무너무 싫어! 싫어!' 하며 가끔씩 등원 거부하는 손주 녀석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곳에 풀어놓으면 나중에 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절기(12월~2월)에는 휴장이다.

수생식물원

5) 수생식물원

산중턱에 이런 연못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멀리 한 무리의 구경꾼들이 모여 얼음 속의 무언가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음 속의 개구리와 금붕어 이야기였다. 너무 이른 철에 나온, 철 모르는 개구리 한 마리가 안타깝게도 얼음 속에 갇혀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금붕어는 살아 있지만 움직임이 없다. 봄이 멀지 않았다. 오늘이 입춘이다.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소로를 따라 올라 계속 가다 보니 솔잎이 제법 쌓인 곳이 있었다. 야간 언덕진 곳에서 솔잎 더미를 쌓아 놓고 무릎 꿇고 정권 단련하는 어르신도 보였다. 역시 건강이 최고다.

한양도성(남산 구간)

6) 한양도성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과 8·15 광복 이후 무질서한 개발로 자연과 도성이 많이 훼손되었었다. 60년대 이후 개발제한구역의 설치와 함께 녹화사업에 노력한 결과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성곽 관련 실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양도성의 시기별 성돌 변화(태조 때, 세종, 숙종, 순조)를 알 수 있었다. 태조 개국 초기 성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쌓았다. 일부 구간은 흙으로 쌓은 토성도 있었다고 한다. 세종대 국가가 안정화되자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숙종 때는 가로 세로 40~45cm로 규격화했다. 순조 때는 가로. 세로 60cm로 정교하게 다듬어 쌓았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한양도성 성돌 각자 성석 유구(공사 실명제, 공사 담당 군부대, 지역, 담당자, 일시등을 기록한 성돌)등으로 도성관리를 철저히 하였다는 점이 놀라웠다. 한양도성 전체 구간에 총 280여 개가 있다고 한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여유 있게 약간 기울어진 한국형 젊은 소나무 한 그루를 더 발견하였다. 수년 전 서울시는 한민족의 사랑, 소나무를 약 1만 5천여 그루를 남산에 식재하였다고 한다.

남산서울타워/도심 고궁 버스 노선도

7) 남산서울타워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드디어 거대한 타워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심과 고궁을 순환하는 01번 버스가 올라왔다. 대지 8,456㎡에 연건평 1만 5378㎡이다.

남산 전망대에서 본 서울 시내

남산 높이는 270.0m이며 남산타워 자체의 높이는 236.7m다. 타워까지 이동 수단은 순환버스, 케이블카 그리고 도보이다. 케이블카는 지하철로는 4호선 회현역이나 명동역에서 내려 걸어 올라오면 탈 수 있다고 한다.

전망대 입구 / 전망대 안

1969년 동양·동아·문화방송 등 3개 민영방송국이 공동으로 종합전파시설 및 관광전망대 시설허가를 받아 1975년 완공하였다. 2000년 YTN이 인수한 후 2005년에 개보수하여 타워층을 “N서울타워”(정식 이름은 “YTN 서울타워”)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전망대 가는 길/ 매표소 입구

1초에 4m로 이동하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전망 엘리베이터홀에 이르면, 서울 전역은 물론 동쪽으로는 양평 용문산, 서쪽으로는 인천 앞바다와 남인천항, 남쪽으로는 남한산성, 북쪽으로는 멀리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전망대 안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마케팅으로 이벤트 N을 통한 음악회와 러브페스티벌, 사랑의 자물쇠 행사 등이 연중무휴 기획되고 있다. 2001년 전망대 관광객 수가 20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공개시간은 오전 10시∼오후 11시까지이고 연중무휴로 개방되어 있다.

전망대안 낙서

특히 식당 주변 벽면, 계단, 간판에 사랑의 열기를 뜨겁게 느낄 수 있는 낙서 흔적이 활활 타오른다. 야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남산은 청춘들만이 오는 곳인 것 같다는 착각을 잠시 했다.

팔각정(옛날 국사당 자리) / 타워 매표소

8) 남산팔각정

남산의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가을에 초제(醮祭,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 즉 국사당(國祀堂)이 있었다.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으로 옮겼다.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남산은 목멱대왕을 모신 신당이 있다고 해서 목멱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매일 15:00~15:40 팔각정 광장에서 전통문화행사가 열린다.

봉수대

9) 남산봉수대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가 있었다. 봉수대의 다섯 굴뚝에서 적과의 상황에 따라 봉화불 혹은 연기가 피어올렸다. 하나가 오르면 이상이 없다. 즉 평화롭다. 둘(적이 나타남), 셋(적이 국경에 접근함), 넷(적이 국경을 침범함), 다섯 개가 피어오르면 전투가 벌어졌다는 신호라고 한다.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남산의 봉수 중 제1은 양주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는 경기도·강원도·함경도와 연결되었으며, 제2는 광주 천천령(穿川嶺)에 응하여 경기도·충청도·경상도와 연결되었고, 제3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연결되었다.


제4와 5는 제1·2·3이 육로로 이어지는 데 반하여 해로로 이어지는 봉수로였고, 제4는 무악 서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황해·평안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으며, 제5는 양천현 개화산(開花山)에 응하여 경기·충청·전라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다. 지금은 다섯 봉수대중 목멱산 봉수대만 남아 있다. 1423년(세종 5년)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년간 존속하였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하여 복원한 것이다. 매일 11:00~12:10 봉수대 봉화의식이 열린다.


남산 케이블카 주변

10) 남산케이블카

수도 서울의 복판에 솟아오른 민족의 영산 남산의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케이블카다. 6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962년 개통되었다. 선로길이는 605m, 1대당 정원은 38명이고 운행속도는 초속 3.2m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려, 탑승을 포기했다. 매표소 위층에 사랑의 열쇠가 주저리주저리 달려 있다. 젊은 사랑의 용광로 열기를 느낀다.


남산공원 길

11) 남산공원길

케이블카 노선옆으로 나있는 계단과 성벽을 따라 하산 내려갔다. 조금 내려가다 보면 중간에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가 나온다. 남산 서쪽에 누에머리(잠두 蠶頭)를 닮은 곳이다. 대표적인 조망명소다. 외국인 신혼 예비부부 한 쌍이 웨딩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남산은 고궁과 더불어 외국인에게는 필수 코스라고 한다.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12) 한양도성유적전시관

2013년~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적은 남산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멸실된 줄로만 알았던 190m 성벽구간을 재발견하였다. 성돌을 들어 올려 쌓기 위해 견인 도르래 작업을 해야 한다. 지주목 발을 고정하기 위해 구덩이를 판 흔적이 노출되어 있거나, 흔적을 보존을 위해 모래를 넣고 덮어 흰 둥근 표시가 많이 눈에 띈다.

구조물 흔적

조상님들 피땀을 흘린 노고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남산 지형 되살리기 프로젝트가 2009년부터 시작되면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성벽의 유구가 땅속에서 발견되었다. 시대별로 다른 규격 모양의 성돌들이 연이어 있다. 끊임없이 개 보수한 흔적이다. 지붕을 덮은 상태에서 그대로 전시되고 있다.


조선신궁 터 / 국치의 길

국치의 길

일제는 성곽을 허물고 그 위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웠다. 현재의 한양도성유적전시관 주변을 포함하는 넓은 장소였다고 한다. 15개의 건물과 380여 돌계단으로 지어졌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옆에 신사의 배전 터가 남아 있다. 전국에 1만여 개소의 방공호가 있었다. 유사시 대피장소 혹은 신물(神物)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추정된다. 방공호 근처가 본전 터였을 것이다. 방공호는 붕괴 위험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해방 후 조선신궁을 철거하고 식물원 동물원 분수대를 만들어 부끄러운 치욕스러운 그 잔재를, 상처를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다. 지금은 분수대 터만 남아있다.


(내용이 길어져 3회에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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