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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Dec 11. 2022

구례 화엄사,   운조루,   곡전제,  석주관 탐방

장모님과  함께한  여행(1)


   장모님께 추억의 여행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구례군 관광 안내도

   구순을 바라보는 분과 함께 짧지만 하루의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최근 동네 친구들이 한 분 두 분 연달아 돌아 가셔서 마음이 많이 불편하신 것 같았다. 약 1개월전 지리산 천왕봉 등산 와중에 소화장애로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셨다는 긴급 연락을 받았다. 다행히 하산길에 퇴원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안심하고 귀경했다.     


   동행인은 4명 장모님, 큰 처남, 옆지기, 나였다. 행선지는 미정이었다. 장모님의 고향 여수냐 구례 화엄사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나는 여수를 강력 추천했다. 하지만 얼마전 다른 처남 가족과 여수를 한번 돌아보았다는 다수 견에 의해 내가 밀렸다. 여수 밤바다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장모님은 여수에서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여순사건(1948년,여수.순천10.19사건)으로 순천 친 동네로 부모님따라 피난왔다가 정착하셨다. 그 동네 총각(장인 어른)과 결혼하셨다. 학업도 중단되었다. 인생 행로가 갑자기 바뀐 것이다. 가슴 아픈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살아 오셨다.     


   금요일(2022.11.25.) 밤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저녁 버스를 타고 순천에 도착하였다. 시골 장모님집 중간 방은 내가 좋아하는 방이다. 두어평 남짓 좁은 방이지만 상처입은 노루가 동굴에서 숨을 몰아쉬며 엎드려있듯 그 방에 누워 있으면 안온하다. 마음의 치유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오래된 대봉시 감나무 밑의 닭장에서 장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려 준다. 겨울 압축된 찬 공기는 마을 장닭들 울음소리를 더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쉽게 잠을 깬다. 온 마을 장닭들의 목청 크기 경연이 시작된다. 골짜기에 위치한 동네라 메아리가 된다. 더욱이 대문도 없는 제일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한밤에 함박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일지라도 금세 알아 챌 수 있다. 얇은 창호지를 통해 흙 마당의 눈 빛이 방안으로 들어 온다.     


   대나무 숲과 작은방 아궁이 사이에는 담이 없다. 귀여운 흰 강아지 `보리`가 자기 집안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다. 내 기억으로도 모두에게 사랑받던 애교덩어리 `수수`의 증손자다. 가끔 지나가는 산 짐승들에게 으르릉거리며 존재감을 나타낸다. 겨울 대나무숲의 이파리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한기를 느끼게 한다. 대숲이 주거지인 친구인 듯한 야생 고양이가 놀러 와도 먹이를 가지고 다투지는 않는다.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가 대나무 평상에 앉으면 북두칠성이 보인다. 북두칠성 바가지 밑, 마을 뒷산에 장인어른 묘소가 있다. 장모님이 동쪽 선산을 두고 굳이 그곳을 주장하신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 처남 차로 구례 화엄사로 출발했다. 구례 화엄사가는 길가에 벚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봄에는 환상적인벚꽃 터널을 거닐 수 있다. 섬진강이 바라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멀리 지리산 노고단 천왕봉이 보인다.     


   화엄사 경내를 관람한 후 운조루(雲鳥樓) 저택을 둘러 보았다. 운조루에는 옛 선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쌀뒤주가 있다. 통나무 속을 파 만든 둥근 쌀뒤주 표면에는 세로로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음각으로 새겼다. 아무나 열 수 있다는 의미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를 사랑채 대문 밖에 놓아두었다. 이웃 타인(他人)의 자존심을 지켜 주었다. 끼니가 없는 마을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운조루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져 있는 곳에 곡전재(穀田齋) 고택이 있다. 같은 마을에 유서 깊은 한옥이 두 채나 있다.    


   이어서 구례 석주관(石住關)으로 이동했다. 1597년~1598년 정유재란때 이곳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다가 산화한 7의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유적지가 있다. 남원읍성 수성전 때 전사한 구례현감 이원춘의 묘도 같이 조성되어 있어 묘의 수는 모두 8기이다.
 

   석주관 칠의사 유적지 입구 우측에는 칠의사와 의병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있다. 언덕 위쪽에 있는 사당 칠의사(七義祠)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우측 능선에는 왜군과 혈투를 벌인 석주관성이 섬진강을 향해 수직으로 달려 내려오며 축성되어 있다.     


   석주관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는 지명이다. 1597년 8월 3일 백의종군하던 장군은 경남 진주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고 구례현(구례군)에 입성, 석주관에서 구례 현감 이원춘과 옛 부하 손인필을 만났다. 그 곳이 수군재건의 길 출발점인 동시에 명량대첩을 준비한 시작점이다.     


   당초 쌍계사를 관람하기로 하였으나, 날이 저물기 시작하여 화개장터 근처 카페에서 하루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장모님은 연세에 비하여 비교적 장거리 여행을 다녀오셔도 여전히 활달하시고 건강하셔서 다행이다. 저녁은 순천 장터에서 장모님이 좋아하시는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다음은 장모님 고향 여수 바다를 함께 다녀 올 계획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다음과 같다.

섬진강 식당>구례 화엄사>운조루>곡전재>석주관/석주관성>화개장터>카페    

식당옆 섬진강 변

1. 섬진강변 식당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멀리 지리산 노고단 천왕봉이 펼쳐져 있다. 큰 벚나무와 벤치가 멋스럽다. 큰 멧돌 연자방아 돌이 큰 벚꽃나무아래 놓여 운치가 있다. 붉은 망에 오십 개쯤 담긴 대봉시 감이 1자루에 만원이다. 감을 딸 때 고개를 젓치고 따는 애쓰는 노력에 비하면 너무 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쏘가리와 게 매운탕이 맛있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남겼다.    

각황전 / 운고각

2. 구례 화엄사

   구례읍에서 동쪽으로 5.4km 떨어진 곳,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화엄사는 지리산 반야봉 등산(2022.09.24.글) 하산길에 이미 관람하고 지난 번 글로 남겼다. 장모님은 불교신자이시다. 휠체어 대여하는 곳이 없었다. 계단 오르고 내릴 때 부축을 해드리고, 평지에서는 지팡이 대신 소형 유모차형태를 뒤에서 손잡이를 잡고 밀며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바퀴가 달린 노모차(간이 의자에 바퀴가 달린 모양)를 이용하셨다. 힘들 때는 잠시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되기도 한다.     


   소원 기원 희망을 기왓장 1장에 적고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기와불사를 하셨다. 접수하시는 분이 장모님 소망이 너무 많아 다 적을 수 없다고 했다. 어찌 기왓장 1장에 소원을 다 담을 수 있으랴. 당신 자신 것은 없고 모두 자식 것 밖에 없다. 손목에 거는 염주와 청량한 울림이 있는 풍경(방울)과 전통색 조각을 연결하여 깁은 고운 밥상보를 선물로 드렸다.      

보제루(좌)와 동.서 탑(우)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른다. 동.서 두개의 탑이 있다. 대웅전이 있고 서쪽탑의 윗부분에는 각황전이 위치하고 있다.
 

각황전(우측 건물)과 석등과 4사자 3층 석탑(가까운 쪽)/  기와불사


   각황전은 국보로 지정된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웅장하다. 각황전 앞 뜰에 서있는 석등은 높이 6.3m, 직경 2.8m 로 국내 최대 규모이다. 각황전 왼편 효대라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4사자 3층석탑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세운 탑으로 특이한 의장과 세련된 조각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이다. 장모님은 노모차 의자에 앉아 각황전 부처님께 오래도록 소원을 빌고 계셨다.     

운조루(좌)와 연못 / 개울

3. 운조루(雲鳥樓)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한 전통 한옥이다. 독창적인 공간 구조를 가졌다. 지역적으로 영호남의 경계에 위치하여 영호남 건축의 장점이 모두 살렸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 1690

~1752)도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았다고 한다. 운조루 집터를 '금가락지가 떨어진 모양'이라고 한다.


    대문 밖 긴 행랑채 앞 연못이 운조루의 격을 높여 준다. 문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다. 운조루를 건축한 유이주(柳爾胄, 1726~1797)선비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고 한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지만, 구례에 인접한 낙안 수령으로 왔다가 아예 운조루를 지어 1776년 눌러앉았다. 운조루는 처음 100여 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인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유이주 선비는 남한산성 같은 성곽이나 공공건물의 정원 공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건축가이기도 했다. 운조루에 전해 내려온 그림인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가 있다고 한다.

  

내부

 

세한삼우(歲寒三友)인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주변에 가꾸어 지조 굳은 군자의 삶을 꿈꾸었을 것이라고 한다. 누마루는 건축적으로 운조루의 중심이다. 담장을 대신하는 대나무 숲은 남도 특유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유이주 선비가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파다 보니 지금의 부엌 자리에서 거북 모양의 돌이 나왔다고 한다. 부엌은 사람 생명을 건사하는 중심이다. 마당에는 돌을 파서 만든 돌절구용 물확이 여러 개 있다. 대청 앞에 놓인 물확은 안주인이 세수를 하거나 손을 씻을 때 쓰였다.


   아들이 장성하여 결혼하면 시어머니가 되어 안방을 차지하고 다시 할머니 방으로 옮겨 생을 마감한다. 생을 마감한 이는 초빈으로 간다. 초빈은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을 모시던 곳인데, 운조루에는 초빈이 잘 보존돼 있다고 한다. 안채에는 시어머니가 있던 안방, 며느리가 있던 건넌방, 할머니가 있던 모퉁이방 등이 그대로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일부 구간을 해체하여 재 복원 공사중이라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다.


   운조루에는 굴뚝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단에 구멍을 내서 연기를 빼내는 장치인 가렛굴(또는 기단굴뚝)형태를 갖추고 있다. 사랑채의 쪽마루를 받친 돌기둥이나 누마루 추녀를 받친 활주가 있다. 활주는 추녀가 처지지 않도록 댄 가느다란 기둥이다.

뒤주 (타인능해) / 대문 상단에 호랑이 뼈

   마지막으로 운조루의 상징은 뒤주다. 과거에는 행랑채 쪽에 있어서 가난한 이라면 누구나 쌀을 퍼 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웃과 함께하는 즐거움이 깃든 운조루는 조선 사대부의 선망의 대상이다.


   몇 해 전에 옆지기의 친구 안내로 처음 방문했다. 뒤주를 보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옛 선인들 중에 이렇게 멋있는 분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꼭 다시 방문해서 그 뒤주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출입구에 갈색 색깔의 새로운 뒤주가 놓여 있었다. 관리하시는 종손 며느리분의 이야기로는 보호 차원에서 집근처 가까운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고 했다. 좀 서운했다.


   '운조루'는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왔다고 한다. 관직을 집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의 기쁨을 생생하게 그린 시라고 한다. 시구의 첫 자를 합한 것이 이 집의 당호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곡전재 / 연못

4. 곡전재 (穀田齋)

   운조루와 같은 마을 약간 동쪽에 있는 또 다른 한옥이다. 이 건물은 1929년 박승림씨가 건립하였으며 1940년에 이교신(-穀田곡전) 씨가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한국 전통 목조 건축 양식의 주택으로 문살의 외미리 형식,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2.5m 이상의 호박돌 담장을 설치하여 집터의 환경을 금환(金環)의 개념을 도입했다.


   박승림씨는 오늘날 승주군에 속하는 옛 순천군 황전면 대치리에 살던 7천석 대지주였다. 1910년 무렵부터 집터를 정하기 위해 많은 지관(地官, 풍수지리설을 쫓아 명당을 찾는 사람)에게 의뢰하여 땅을 알아보았고, 함께 땅을 보러 다닌 이교신과 함께 집을 지었다.

출입문 /안채

   

풍수지리설의 금환락지(金環洛地 - 선녀가 금반지를 떨어뜨린 자리)에 해당한다고 보아 집터 자체를 반지 모양으로 둥글게 조성하였다. 금환락지란 생산이 풍부한 땅을 의미한다.

원래 지어진 집은 모두 여섯채 53간 규모였다고 한다. 담장을 높이 올려 안을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다. 부유한 민가의 트인 ㅁ자 구조라고 한다.


   울타리 밖 동편에서 물을 끌어들여 동행랑채 옆에 연못을 마련하였고, 마루방을 만들어 여름철을 보낼 수 있게 하였다. 연못의 물은 집을 감아 돌아 대문 옆 정원을 거쳐 빠져나간다.


   1940년 박승림씨가 사망한 뒤 후손이 이교신씨에게 매각하였다. 이후 이교신씨의 호인 곡전(穀田)을 따 집의 이름이 곡전재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민박을 하며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


   장모님은 친화력이 참 좋으시다. 한옥 체험자와 벌써 친한 사이가 되어 마루에 걸터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석주관 칠의사

5. 석주관(石柱關)

1) 석주관

   경남 하동에서 구례로 들어서는 위치에 석주관성이 있는 방어기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좁은 도로(현재 편도 1차선)를 지키고 막으면 적들은 경상 하동에서 전라 구례로 넘어 갈 수 없다. 바로 앞에 섬진강이 흐른다. 구례현감과 의병과 화엄사의 승병들은 왜군의 호남내륙 진출을 막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처절하게 싸우다 순절했다. 구례현감 이원춘과 7의사(왕득인 · 왕의성 · 이정익 · 한호성 · 양응록 · 고정철 · 오종)의 묘가 있다. 석주관 칠의사 유적지 입구 우측에는 칠의사(七義祠)와 의병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우측 담벽에 좁은 문이 나 있다. 석주관성으로 올라가는 진입 작전 통로다.


   정유재란 왜병이 들이닥치자 1597922일 구례의 선비 왕득인(王得仁)이 의병 50명을 이끌고 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왕득인은 적을 여러 차례 기습해서 공을 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王義成)118일 아버지가 석주관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이정익(李廷翼)·한호성(韓好成)·양응록(梁應祿)·고정철(高貞喆)·오종(吳琮) 등 수백명의 의병과 화엄사의 승병 153명이 석주관에 집결, 왜병을 공격하였다.


   119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이정익과 고정철이 조경남의 의병과 합세해 연곡에서 진을 쳐 왜군 60명을 죽이고 조선인 포로 200명을 구출했다. 무기를 공급받을 수 없어 나무를 베고 바위를 굴러 길목을 차단하고 기습과 백병전으로 여러 차례의 전공을 올렸다. 당시 죽은 왜병들로 인하여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하여 이때부터 이 고장을 피아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8(선조 31) 하동으로부터 큰 무리의 왜병이 쳐들어왔다. 의병들은 결사적으로 대항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의병들이 전몰하고 말았다.


   석주관 유적지는 이곳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다가 산화한 7의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성하였다. 남원으로 퇴각하여 남원읍성 수성전 때 전사한 구례현감 이원춘의 묘도 같이 조성되어 있어 묘의 수는 모두 8기이다. 석주관 칠의사 유적지 입구 우측 언덕 위쪽에는 칠의사와 의병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있다. 칠의사(七義祠) 건물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2) 석주관성

석주관 성 /  성에서 바라본 섬진강 (칠의사 입구 보수 공사중)

   

고려시대 말기 왜구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이곳에 진을 설치한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이 호남지역으로의 일본군 진입을 막기 위해 옛 성터에 석주관성을 쌓았다. 지리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고 그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군사적 방어지형으로 중요한 길목이다. 경사진 산허리를 따라 만든 성곽의 길이는 약 736미터이고 돌로 쌓아 만든 벽의 높이는 50~120센티미터이다.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놓아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석주관 전투(石柱關戰鬪)1597~1598(정유재란, 선조 31)에 구례지방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병에 맞서 석주관을 사수하다 전사한 전투이다.


3) 이순신장군의 수군재건과 명량대첩 출발지

   구례 석주관성은 호남 방어의 주요 요새이다. 손인필은 아들 숙남과 함께 이순신 막하에서 임진, 정유의 난 때 전공을 세워 군자감 첨정 관직 받았다고 한다. 손인필 석주관 비각이 구례군 봉북리에 있다.


   난중일기속의 석주관을 살펴보면 이순신장군은 삼도 통제사(統制使)로 복직(진주 손경례 집, 기복수삼도통제사교서를 받음)후 곧바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구례현감 이원춘과 손인필(孫仁弼)을 만났다. 왜군 10만 병력이 섬진강을 따라 구례 방향으로 북상한다는 급박한 정보를 수집한다. 손인필은 이순신 장군을 따라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 순절하였다.


4) 손인필과 이순신의 관계

   이순신 장군은 직속 상관이 된 도원수 권율 장군을 만나기 위하여 한양에서 전라쪽으로 백의종군하며 내려왔다. 1597(정유년) 426일 구례 손인필의 집에 도착하여 쉬었다.


    속수구례지(續修救禮誌)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구례를 떠나 명량 방향으로 떠나자 손인필은 삼남 숙남(淑男)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고 장남 응남(應男)과 함께 이순신 장군을 따라갔다. 이 장군 막하에서 활약하다가 159811월 노량해전에서 응남을 잃고 손인필도 분전하다가 결국 적탄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왜난이 평정되자 구례군 간전면 삼신동 뒷산에서 초혼招魂을 하여 장례를 치루었고, 참선무훈叅宣武勳으로 특별히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을 추증하고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군과 부하의 관계를 넘어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였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임전무퇴 정신에서 그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화개장터 / 쌍계사 안내석

6. 화개장터

   화개장터는 영호남의 화합의 상징이다. 출입문이 아치형으로 멋있게 놓여 있었다. 초가집도 운치를 더한다. 일정상 바로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더로드101)

7. 카페

   경남 하동 쌍계사 가는 길 우측에 있는 유명한 카페(더로드101)가 있. 작은 언덕에 현대적인 건물과 화초 수목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측 휀스밖에 어린이놀이터가 있다. 개울건너 산기슭에는 녹차밭의 이랑이 구불구불 어우러져 자연속의 한 폭 수채화다.

카페 전경

   

풋풋한 젊은이들이 휴일을 즐기고 있다. 산 능선의 나무가 까까머리 중학생 머리끝처럼 가지런히 서있었다. 나에게도 초라했지만 회상할 수 있는 싱싱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장모님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 본다. 해질녘의 저녁노을도 떠오르는 태양이 있는 아침만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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