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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llalawoman Oct 07. 2022

작지만 빛나던 그 시절

13년 전, 두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과제들을 모두 끝내고 한 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일과 공부 그리고 부모님을 대신하던 경제적인 문제까지 모두 해결한 아주 후련하고, 스스로 대견한 순간이었지요. 길게만 느꼈던 터널을 통과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꼭 필요한 것만 담은 배낭을 메고, 상상 속에만 있던 곳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태어나 처음으로 제 감정을 매 순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 나갔던 시간이었습니다.

인생 모토가 '악으로 깡으로 살자'였던 나는 여행 중에 겪은 경험들이 이전보다 유연하고 보다 평온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스위스 슈퍼마켓에서 식빵 한 봉지와 우유를 계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슈퍼마켓 캐셔로 일을 하면서도 을의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사회적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인식 안에서 그저 도구적으로 일을 선택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 모든 고정관념과 의식의 한계에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게 허락된 시간 안에 마음속에 더 많이 담기 위해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걷고 또 걷고, 식빵 하나 입에 물고 또 걷던 그 시간들은 몸은 고되었지만, 나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걱정 모두 털어내고 매 순간 감탄과 환희와 그리움으로 가득 채우던 그 순간들이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간 중 한 장면입니다. 그 시절의 나는 용기와 희망이 가득한 청춘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두렵지 않고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내 두 다리와 뜨거운 가슴이 있다면 어디서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가득 품을 수 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때의 나를 멀리 두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빛나던 시절을 회상하니, 마치 어제 일과 같이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그 시간 안의 나의 반짝이던 모습이 아주 잘 보이네요. 그때의 그 솟구치던 용기와 희망을 다시 꿈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나가버린 추억이 아닌, 오늘의 일기로 다시 써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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