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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Sep 27. 2019

“지금 전 부치는 사람한테 커피심부름 시키시는거에요?”

나의 잔혹한 명절 투쟁기1

(사진출처: 연합뉴스)



이 글은 왜 더 잘 싸우지 못했나를 돌이켜보고 다음 설엔 꼭 이렇게 말해주리라 다짐하며 쓰는 지난 추석 투쟁의 복기다. 나와 같은 '며느리'(며느리란 말 제발 없앴으면)들은 명절을 다시 겪는 것 같은 악몽일 수 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란다. 혹시나 이 글이 며느리를 이겨먹고 싶은 시어머니들의 참고가 되진 않길 바란다. 아무튼, 난, 더, 잘, 싸울 것이다.


결혼하고 만 1년. 총 3번의 명절을 지났다. 나와 남편의 신혼생활은 정말정말 행복하다. 대단한 취미도 없는 부부가 밤마다 침대에 드러누워 지난 드라마나 예능을 다시 보거나, 영화를 본다. 물론 가장 많은 시간 핸드폰 게임을 함께한다. 같이 밥을 차려 먹고, 남편이 청소하면 난 널부러놓은 내 짐들을 정리한다. 닥달해서 겨우 산책도 데려나가고, 밤 11시에도 배고프다며 국수를 삶아먹곤 한다. 가끔 함께 갚아가야할 빚을 헤아리다가 막막함에 접어두고 로또를 산다거나, 어차피 귀찮아서 나가지도 않을거면서 주말에 뭐할지 공계획을 짠다. 말로만 영어회화 공부 다짐도 수백번했다. 그냥 이런 생활이 난 정말 좋다. 빈둥빈둥이 우리 부부의 전부지만 그냥 그걸로 난 너무 좋다. 명절이 오기 전까진.


지난 두 번의 명절은 정말 폭격을 맞은듯했다. 그래도 첫 명절이니까, 그래도 첫 설이니까, 하며 어수룩 당했다. 너무 어안이 벙벙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인지 가늠도 안 갔다. 그냥 총체적 난국이었고, 난 아무말도 못했다. 명절앞뒤로 한달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잠도 못 잤다. 가만히 누워있다가도 눈물이 났다. 남편과 죽일듯이 싸우는 일도 여러번이었다. 내가 결혼을 왜 했을까, 난 왜 이렇게 순진했을까, 자책했다. 어김없이 명절은 돌아왔다.


추석 전날 나의 본가 가족들은 팔순 넘은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에 간다. 남편네 큰집은 모여서 추석전날밤인 남편의 할아버지 제사(추석 당일 돌아가신 분을 굳이 전날 따로 제사지내드린다.)를 지낸다. 낮엔 여자들은 집에 남아 음식을 준비하고, 남편과 남자들은 여자들이 싸준 음식들을 챙겨 성묘를 간다. 밤엔 여자들이 만든 음식들로 남자어른의 주제로 제사를 지낸다.


"추석 전날 우리 할머니댁 갔다가 저녁에 자기네 큰집으로 갈게"

"...그래"

알겠다고는 하지만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냥 신경을 끄면 될 걸, 기어코 묻는다. 아, 세심한 나의 성격이여.

"엄마한테 뭐라고 해야되지"

아무리봐도 질문이 아니다. 엄마한테 말도 못할 잘못을 내가 저질렀다는듯한, 질문을 가장한 타박에 화가 확 치민다. 아무 할머니네 간대, 하면 되잖아!!! 라고 버럭하기에 난 너무 친절하다. 아, 내 심성이여.

"응?? 그게 왜?? 내가 얼굴도 못 본 자기 할아버지 제사상 차리느라 살아계셔서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팔순 넘은 할머니 보러도 못가? 너무 이상하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하잖아."

더이상 말을 말았다. 자기 부모 설득은 자기가. 서른이 넘었는데 제 앞가림 정도는 제가 해야지.


남편은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무는 할머니네 갔다가 저녁에 제사때 갈거야."

내 옆에서 통화를 하니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만했다.

"어. 걔네 가족 다 가지."

아마도 꼭 가야되니, 가족들이 그날 다 가니? 라고 물으셨겠지.

떫떠름하게 본인 엄마와 통화를 끊더라. 모른척했다. 그래, 이게 어디냐.


사실 나의 본가는 겁나 가부장적이다. 충청도 사람들이라 억수로 보수적이다. 그래서 머리크고부터는 명절에 가서 남자들처럼 같이 드러누워있거나, 아예 안 갔다. 내가 안하면 동생들과 엄마가 고생하지만, 다들 눈칫밥을 주지만, 도무지 빡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들 전 부치는데 옆에서 뜨거울때 먹어야 맛있다며 술상 차리'라'는 남자들이라니. 본인들이 차려먹어도 욕지거리가 나올 판국에, 여자들이 차려줘야한다. 그래, 참자, 참자.. 못 본척하고 전을 부치는데 누가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나보다. 전부치는 막내를 부른다. "00아, 가서 숟가락 좀 가져와라."

더는 못 참고 화를 냈다.

"아니,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전부치고 있는 거 안보여? 옆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전이나 주워먹으면서 전부치는 애한테 숟가락 심부름까지 시키냐? 뭐하는거야 지금!!"

나의 부, 숙부, 백부가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같이 전을 부치고 있었다.

머쓱해하는 부와, "아이고참. 세상이 어떻게 될라고." 라는 백부.

그나마 "그래, 요즘엔 남자들도 집안일하고 그런디야."하는 할머니 말에 위안 삼았지만

안갔다, 그 뒤로.


그런데 굳이 그런 집을 왜 갔느냐고? 오기로 갔다. 그래, 아무렴 내 본가가 남편네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그나마 할머니집엔 죄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고, 내 편은 없어도 화를 낼 순 있으니까. 난 왜이렇게 낙관적인지. 아, 나의 고질병이여. 그때 할머니가 한 말을 기초로 조금은 달라졌겠거니 하는 기대까지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갔더니 역시나 전을 한 마루 붙이고 있다. 힘드신데 조금씩만 하시라고 했다가 얼마나 더 조금하냐고 타박받고는 닥치고 전이나 부쳤다. 마당 건너 정자에서 전을 붙이는데 갑자기 본채 주방에서 할머니가 날 다급히 부르신다. 정자를 내려와 신발을 신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뛰어가서 신발을 벗고 주방에 올라섰다.

"작은 아빠 커피 좀 타 드려라"


이게 말이냐. 너무 황당해서 다시 생각해도 울화가 치민다.

"할머니, 지금 전부치는 사람한테 커피심부름 시키시는거에요? 아니 뜨거운물 나오는 정수기도 있고 커피믹스도 있고, 그냥 따라서 물만 부으면 되는데 그것도 못하면 마시지말라고 하세요. 할머니 아들 너무 오냐오냐 키우시는거 아니에요?"

할머니 힘 있을 때면 벌써 매타작이었을 것. 이빨 빠진 할머니에게 더이상 그럴 힘이 없다.

"됐다! 싫으면 하지말어!!"

"그래요? 그럼 싫으니까 안 할래요."

마누라 떄려서 이혼까지 당한 인간을,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을, 억지로 인사하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내가 커피까지 타 바쳐야하나. 남편 큰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다짐했다. 할머니 돌아가시는 날까지 시골에 다신 안 가기로.


이런 가부장과 불평등의 표본같은 곳에서 30년을 자라서인지 난 이런 상황들을 도저히 가면쓰고 넘길 감량이 못된다. 이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들이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질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기(performance)를 한다지만, 이 가면은 내 얼굴에 맞지도 않거니와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어떠한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 역할이다. 이런 불편한 연극에서 멋진 배우가 될 자신이 나는 없다. 할머니네집에서 1차 폭격을 받고 남편네 큰집으로 갔다. 내 발로 전쟁터를 걸어들어갔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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