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건져내는 마음으로 - 욕망의 달리기
달리기로 한 이유
노트북, 헤드셋, 책 3권(얕은 집중력으로 1권을 끝까지 읽지 못한다), 일기장, 아이디어노트, 필사노트, 필통, 파우치..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백팩에 욱여넣고 카페로 향하던 어느 여름날. 무거운 가방에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데, 그것도 모자라 살갗을 태울 것만 같은 햇빛, 사우나 같은 습기에 제멋대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도, 입고 있는 옷도, 메고 있는 가방도 다 벗어던져 버리고 싶었다. 독서와 글이 삶 전반을 지탱하는 만큼 그 무게쯤은 감내해내야만 했다. 꿈과 일상이 맞닿아 있기에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그 다리를 건너려거든 무게정도는 감내하시오.
집에 도착하니 이번엔 숨 막힐 듯 답답한 방안이 눈에 들어왔다. 각종 화장품, 옷, 책, 노트, 가방 심지어는 건강즙까지.. 경찰일 때 이사를 총 4번 하면서(집->근무지 1->근무지 2->근무지 1->집) 거대봉투에 미친 듯이 쓸어 담아 버리고 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방안은 각종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더 많이 읽어야 한다는 욕망, 아름다워야 한다는 욕망, 깔끔해야 한다는 욕망, 건강해야 한다는 욕망.. 그 욕망은 수없이 많은 물건들을 불러냈고 그것들은 욕망 해소와 동시에 언젠가는 버려야만 하는, 골치 아픈 잔재물들로 남아있었다. 수많은 욕망들에 잠식되어 짓눌리다, 자연스레 내 시선은 아래쪽으로 향했다. 욕망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뱃살. 욕망으로 가득 찬 주변환경과 달리 내 뱃살은 욕망 하나 없이 불룩했다. 성장을 도모하는 쌓기는 희미하게나마 성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게으른 적재는 죄였다.
여태 배웠던 운동들은 누군가의 가르침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배움 없이는 물에 뜰 수 없었고, 균형을 잡을 수 없었고, 근육을 쓸 수 없었다. 배우는 감각을 사랑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감각에 이별을 고해야 했다. 누군가의 힘을 빌어오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내 힘으로 치워야만 설령 그 배울 수 없는 환경에 놓일지라도 다시 치워낼 수 있었다. 무언가를 드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 있는 상태였기에 나에게 가장 적합한 건 달리기였다.
딱 일주일만 / 1. 아침에 2. 공복 상태에서 3. 3km만 가볍게 달려보자.
하루, 이틀, 삼일... 이 넘어갈수록 큰 변화는 느끼지 못했다. 게으름을 덜어내기 위해서 그저 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7일이 넘어가는 순간 '아, 이래서 달리는구나!'라는 느낌이 훅 들어왔다. 그 느낌의 공통분모는 무언가를 덜어낸다는 것에 있었다.
1. 운동에 대한 부채감이 사라졌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크게 작용할 때가 있다. 마음의 짐이 그렇다. 그것은 때때로 내 무거운 백팩보다 나를 훨씬 더 무겁게 짓누른다. 특히 운동을 하지 않을 때 규칙적인 삶에 대한 부채감을 자주 느꼈다. 일에 치이고, 시간에 치이고, 나약한 의지에 치여 내가 정한 질서에 혼란이 왔을 때. 흐트러진 마음의 질서를 바로 잡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바로 나가서 운동을 하거나, 침대에 누워 '오늘은 힘드니까'라며 합리화하던가, '내일부터 하지 뭐'라고 미루던가. 하지만, 아침에 달리기를 하면 오후에 운동을 해야 한다는 혹은 하기 싫다는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으니 질서를 바로잡을 일이 없다.
2. 군살이 사라진다
놀랍게도 뱃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늘 운동하기 전에는 무언가를 먹고 갔다. 먹고 가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먹은 것을 소화시킬 뿐이니 뱃살이 빠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때당시에는 늘 의문이었다. 뱃살 말고도 종아리, 허벅지 등 조금씩 살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공복에 뛰었다는 것만으로도 2kg나 감량되었다. 군살이 사라진 만큼 꽉 끼였던 바지도, 치마도 조금은 여유 있는 상태가 되었다. 평소에 입던 옷이 조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에 효율을 더할 수 있다.
3. 더 많은 것들을 감각할 수 있다
한 바퀴에 1km가 조금 넘는 산책로이기 때문에 3km를 달리면 똑같은 풍경을 다르게 3번 감상할 수 있다. 맑은 공기, 다른 색을 입은 나뭇잎, 아직 지지 않은 달,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출근하는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 이렇게 자연과 일상을 감각하는 일은 동시에 스트레스를 덜어낼 수 있게 해 준다. 퇴사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 때면 종종 나를 가늠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나 잘하고 있나? 게으른 건 아닌가?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건가? 정답 없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스스로에게. 이 정도면 잘하고 있겠지, 에이 부지런한 거지, 오늘 시간 잘 보냈는데!? 라며 어림짐작할 뿐인 대답들. 희미한 대답들을 조금이나마 정답으로 이끄는 일을 아침 달리기가 가능하게 한다.
7일을 넘어가고 있는 달리기는 아마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무언가를 계속 더 하라고, 더 잘해야 한다고, 더 벌어야 한다고 암묵적 강요를 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달리기는 유일하게 무언가를 덜어내도 된다고 손을 내밀었다. 자주 덜어냄으로써 마음의 균형을 잡아보려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_r9QqEUqbvY&ab_channel=%EB%AF%BC%EC%9D%B4%EC%9D%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