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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Oct 21. 2024

5. 가늠할 수 없는 고통

   


나는 넘어진 후유증으로 방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거실에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두고 생활하는 남편은 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겨우 식사 때가 되어서야 ‘밥 안 먹어?’ 묻는 것이 다였다. 그건 내게 밥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일어나 밥을 차리라는 뜻이었다. 나는 거북이처럼 움직여서 밥을 차려주고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집안에서는 텔레비전 외에는 소리 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거실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요양보호사가 오면서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거실의 공기가.    

 

면접날과 달리, 일을 시작하면서 요양보호사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와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나았던 모양이다. 딸은 요양보호사가 도망갈까 두려운 사람처럼 음식을 사다 날랐다.

“아유, 반찬이 참 맛있네요. 따님이 부모님 드시라고 신경 많이 썼네요.”

요양보호사의 말에는 딸에 대한 칭찬과 주방 일이 줄었다는 만족감이 묻어 있었다. 크지 않은 집에 하나는 거실에 하나는 안방에 가구처럼 있으니, 일이 많을 리 없었다. 자기 살림이라면 쓸고 닦을 것이 보이겠지만 일정 시간만 지나면 떠날 테니 요양보호사는 최소한의 청소를 하고, 최소한의 정리를 했다. 하지만 그저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요양보호사는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마사지를 해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그러자 요양보호사는 남편에게 갔다. 남편도 나처럼 처음에는 거절을 했다. 하지만 요양보호사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어르신, 그러지 마시고 여기에 발 한번 담가보세요.”

살가운 목소리였다. 남편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주섬주섬 양말을 벗는 것 같았다.

“발을 이렇게 마사지하면 혈액 순환이 잘 돼서 몸이 한결 편해져요.”

요양보호사가 남편의 발을 마사지해 주는 모양이었다.

‘저 양반 뒤늦게 호강하는군.’

나는 괜히 심통 난 기분이 되었다.

“거참, 시원하군. 이런 건 배운 건가?”

“예, 요양보호사 되면서 좀 배웠어요.

젊어서는 마사지샵에서 일한 적도 있고요.”

웃음기까지 섞인 요양보호사의 말소리에 나는 ‘여시 같은’이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새벽녘이면 늘 한 번은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야 해서다.

자다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 건 고역이었다. 기력은 점점 약해지는데 몸이 내게 요구하는 일은 많아지는 꼴이었다. 그러니 늙어갈수록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누가 내 이런 사정을 알 수 있을까? 누구에게 내 이런 사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넘어진 후로 몸을 일으키는 건 더 힘든 일이 되었다. 하지만 오줌도 참기 힘든 건 마찬가지라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에 가려면 거실로 나가야 했다. 걸음으로 센다면 방에서 스무 걸음도 되지 않을 거리였다. 나는 ‘끙’하고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고, 왼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오른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랬다.


“아이쿠, 엄마야!”

힘을 준 왼 다리가 미끄러지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급하게 서랍장 귀퉁이라도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것처럼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세게 주저앉았는지 머리가 울리고, 가슴도 뛰었다. 어디 부러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프기도 하고, 무서운 맘이 들었다. 하지만 내 몸과 맘만 요란할 뿐 새벽은 고요했다. 누구 하나 나를 도우러 달려오는 이 없었다. 차라리 길바닥에서 넘어졌을 때가 나았던 걸까? 부질없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나는 애써 씩씩해지려 했다.    

  

넘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요의는 남아 있었다. 나는 그대로 조심조심 기어서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더, 더 거북이처럼 느리게 볼일을 보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나는 스스로 엑스레이를 찍듯 천천히 몸 상태를 점검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건가?

여기는 원래 이렇게 아팠나, 이번에 넘어져서 아프게 된 건가?’

그리고 슬쩍 다리도 들어보았다. 쉽지는 않았지만 다리는 움직였다. 다리가 움직인다면 부러진 것은 아니겠지? 나는 불안한 맘을 조금 누르고 눈을 감았다.      




“안녕하세요?”

요양보호사가 바깥공기를 몰고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나는 겨우 인사를 받았다. 지난 새벽 넘어진 후, 나는 더욱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디가 아프냐는 남편의 말에 새벽에 미끄러졌는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고만 했다. 남편은 별말 없이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지나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후가 되니 가늠하기 힘든 고통이 몰려왔다. 참을만하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이내 아파서 신음이 나왔다. 소리라도 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신음을 참지 않았다. 아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남편과 요양보호사가 급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어르신, 119를 부르던지, 어서 자식들에게 연락을 해야겠어요!”


집으로 119 구급차가 도착했다. 나는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올랐다.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통이 조금이라도 잦아드는 순간에는 불안감이 몰려올 뿐 당시 나는 생각 깊은 어른도, 막무가내로 구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저 이 고통이 잦아들기만을 바라는 신도였다. 나는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맘 편히 도와달라 빌 곳은 하나님뿐이었다.     

 



나의 기도가 통한 걸까, 한참 후에 나는 고통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너무 지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겨우 눈을 떠보니 내 옆에 큰아들이 있었다.

“엄마, 괜찮아요?”

“응, 괜찮아.”

나는 아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엄마, 이제 아프지는 않지? 진통제도 맞고, 가슴에 강력한 진통 패치도 붙였어. 그래도 혹시 아프면 말해요.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할게.”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고통이 진통제 덕분에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진통 패치도 붙이고, 큰아들도 옆에 있으니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의 고통과 불안이 동시에 해결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표정은 분주해 보였다.

“엄마,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지?”

나는 괜찮다고 했다. 화장실을 가건 밥을 먹으러 가건 편하게 다녀오길 바랐다. 그런데 멀리서 화난 아들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갑니까?”

“입원할 곳이 없는데 그럼 어쩝니까? 당장 수술할 분도 아니니 더더욱 입원할 수 없습니다.”

아들은 의사를 붙잡고 한참 실랑이를 하더니 내게 돌아왔다. 그리고 딸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아들의 말에 나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해결할 힘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운전을 하고, 아들의 부축을 받아 딸네 집으로 왔다. 딸은 날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지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나를 맞았다. 걱정스러운 눈빛이 가득했다. 나는 옅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후에 기억은 가물하다. 아마도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 같다. 날마다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지만 어느 즈음에는 기억이 없다. 그저 그러려니 한다.




“엄마, 오늘은 얼굴이 좀 괜찮네?”

앞치마를 두른 딸이 눈앞에 있었다. 딸은 쟁반에 음식을 담아 들고 침대 앞에 앉았다. 딸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멀리 배 타고 나갔다 돌아온 선원처럼 깊은 잠을 자더란다. 딸의 설명은 적절했던 거 같다. 나는 파도에 휩쓸린 배에 탄 듯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잠은커녕 한 시도 편한 순간이 없었다. 그러다 딸네 와서는 어떻게 눕고 잤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잤다. 물 한 모금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새벽 요의로 잠이 깨는 일도 없었다.


딸은 준비한 식사를 내 앞에 펼쳤다. 잠은 잘 잤지만 아직 식욕이 돌지는 않았다. 입안이 껄끄러웠다. 그러자 딸이 어린아이에게 반찬을 올려 밥을 먹이듯이 수저에 밥을 먼저 뜨고, 반찬을 올렸다. 나는 입을 벌려 받아먹는 것이 어색했지만 딸의 애쓰는 마음을 해치지 않으려 한 술 입에 넣었다. 그러자 딸은 국을 떠서 씹어 삼키기 좋게 해 줬다. 나는 열심히 받아먹었다.


무언가를 먹고 나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먹고 나니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통증은 줄었지만 걷기 힘든 건 여전했다. 의사 말로는 심한 건 아니지만 골절이 있다고 했다. 새벽에 방에서 넘어지면서 금이 갔던 뼈가 시간이 지나며 골절이 된 거 같다고.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땅을 짚어 온전히 설 수는 없었다. 딸은 워커를 내 앞에 내밀었다. 큰아들 내외가 나를 딸네 데려다 놓고, 우리 집에 가서 내게 필요한 옷이며 물건을 잔뜩 가져다 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집에서 쓰던 워커가 딸 집에 있었던 거다. 워커는 네 개의 지지대 중 뒤쪽 두 개에 바퀴가 달려서 짚고 걷는 데 도움을 준다. 다리 힘이 줄면서 나는 지팡이보다 앞서 워커를 쓰기 시작했다. 워커를 잡고 일어나고, 워커를 잡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어설 수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봐도 잘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딸이 내 옆에 바짝 서더니 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워커를 쥔 내 몸 뒤로 바짝 붙어서 내 발밑으로 자기 발을 넣어서 발걸음을 옮겨줬다.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나의 발을 자신의 발로 옮겨준 것이다. 어린 아기가 아빠 발 위에 올라서 뒤뚱뒤뚱 걷는 놀이를 하듯 딸이 내 발밑에서 나의 발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하루에 몇 번씩 화장실을 오갔다. 귀하게 키운 딸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는 것이 미안했지만 딸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딸네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이 전화를 했다. 몸은 좀 어떠냐고 평소와 달리 살뜰하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남편은 어떤지 보러 오겠다고 했다. 딸네고 하니 더 오고 싶은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남편은 자꾸 오겠다고 했다.

“오지 말고 그냥 있어요, 좀!”

나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남편은 나를 위해 온다고 하지만 실상 그건 나로 모자라 남편까지 자식 고생시키는 일이었다. 남편은 한 번도 혼자서 딸네 온 적이 없었다. 한번 올라치면 자식들이 와서 데리고 가고, 데려다줬다. 그러니 남편이 나를 보러 온다는 건 자식 중 누군가 아버지를 모시고 오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가 딸 신세를 지는 마당에 남편까지 그런 신세를 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눈치도 없이 오후 늦게 딸네 왔다. 딸의 부탁으로 사위가 남편을 태워 온 것이다.

“쉬는 날 김서방이 편히 쉬지도 못하고 애를 써서 어쩌니?”

“괜찮아, 엄마 말대로 쉬는 날이잖아.”

눈치 없는 남편은 딸네 와서 저녁까지 잘 얻어먹고 사위 차로 돌아갔다.   

   

사실 자식 집에 가야 한다면 아들네로 가고 싶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노인네라 그랬다. 하지만 큰아들은 나를 데려다 놓고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 아들을 결혼시키며 나의 결혼 조건은 하나였다. 우리 집 사람이 되려면 교회에 다닐 것! 다행히 신앙심 깊은 며느리를 맞았다. 하지만 며느리는 뭐든 기도로 해결하려 했다. 멀리서 기도는 해주지만 찾아와 도와주는 법이 없었다. 누가 등이 가렵다고 하면 가렵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 긁어주는 법이 없었다. 나는 권사니까 뭐, 이해했다. 그런데 그즈음에는 좀 서운했다. 아마도 사위 보기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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