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3살이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말을 할 수 없다. 글을 쓸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긴 내 마음속 아니, 머릿속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들을 글로 풀어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아니, 애초에 들어보려 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나이 먹었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내팽개쳐 두었다.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쇠했고, 몸의 노쇠는 곧 정신의 노쇠를 의미했으니까. 말하기도 귀찮아 누워만 있었고, 자식들이 알아서 해주겠거니 믿고 맡겨두기도 했다. 그런데 말을 하지 못하게 되자 내 안의 생각들은 점점 더 커져갔다. 말을 못 한 지는 1년이 넘었다. 지난해 내 목에 목관이 끼워졌기 때문이다.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내주고 다리를 얻었다면 나는 목소리를 내주고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이게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인지 말이다. 나는 말만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내 목에 끼워진 목관은 기계와 연결되어 내 머리맡에 있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흐트러지면 경고음이 울린다. 그러니 내가 사는 세상은 침대 위가 전부다. 이런 삶을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긴 나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삶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듣고, 보는 것. 병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간병사와 의사, 간호사 그리고 나를 찾아오는 자식들뿐이다. 그것도 그들이 찾아와야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내 생각의 폭이 터무니없이 작을 거라고 여기지는 마라. 제일 처음 말했듯 나는 80년을 넘게 살았고, 그 긴 시간의 삶이 내 머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쉽게 상상하지 못할 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들어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하고 싶다. 말도 글도 내게서 떠났지만 머릿속 생각은 지나치다 싶게 이어지고 있다. 한가로우면서 바쁜 꼴이다. 살면서 이렇게 오래 생각이란 걸 한 적이 있었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빠르고 거친 발자국 소리.’
사람이 저런 발소리를 내는 거라면 급한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내 옆에서 졸던 간병사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비슷한 발소리를 내며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간병사가 돌아와 알려주길 기다린다. 하지만 병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럽기만 하고, 간병사는 감감무소식이다.
잠시 후 발소리가 다양해진다. 간병사들의 슬리퍼 끄는 소리와 익숙한 간호사나 의사의 발소리가 아닌 소리. 그건 건장한 남자의 발자국 같다. 나는 소리에 더 집중해서 스스로 상황을 알아내려 애써본다. 하지만 좀처럼 힌트를 주지 않으려는 듯 소리가 잦아든다. 이건 또 뭔가. 그때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퀴 소리 뒤로 다급하게 쫓는 발자국 소리가 이어진다.
“이것도, 이것도 챙겨야지.”
다급하여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작게 들린다. 나는 두려워진다. 두려움이 점점 올라와 불안한 상상에 이른다.
‘불이 난 걸까?’
냄새는 나지 않지만, 그 생각이 들자 온몸이 뜨거워진다. 나는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니 오직 감각에 의존할 뿐이다. 이 밤의 소란은 불길한 상상을 부채질한다.
‘밤에 이렇게 다급할 게 뭔가.’
‘불이 난 것이 틀림없다.’
나는 진정하려 애써보지만, 발걸음 소리와 바퀴 소리, 짐을 챙기는 듯 다급한 목소리는 끝내 나를 불안에 몰아넣는다.
‘이대로 불타고 마는 걸까?’
한 줄처럼 벌어진 문틈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느껴지는데 나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 ‘내가 여기 있다’ 알릴 방법이 없다. 불길을 피해 움직일 수 없는 몸뚱이가 원망스럽다. 움직여보려 애써봤지만 정말 뒤척일 수조차 없었다. 텔레파시를 보내듯 열심히 문을 노려볼 뿐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눈물이 나 시야까지 흐려진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 귓구멍까지 모여드는데 그마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두려워 울고 있다. 이대로 불타고 마는 건 아닌지 무섭다. 죽음을 원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아니, 정말 내가 죽음을 원하긴 한 걸까?
그 순간, 병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간병사가 들어왔다.
“엄마, 왜 그래? 울었어?”
간병사는 익숙한 손질로 내 얼굴에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왜 울었냐고, 혹시 무서웠냐고 묻는다. 나는 서둘러 눈을 깜빡여 대답한다.
“내가 버리고 도망간 줄 알았구나?”
간병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의 절대적인 의지에 만족한 듯 웃었다. 그 모습에 반가운 맘이 싸늘하게 식었다. 뒤이어 안도하는 맘까지 사라져 버렸다.
나의 간병사는 능숙하다. 자랑처럼 떠들어대길, 나와 비슷한 환자를 돌본 경험이 많다고 했다. 게다가 하루도 쉬지 않아서 간병사가 바뀌는 번거로움이 없다. 딸이 간병사 하나는 기막히게 잘 찾은 셈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매일 같이 있다 보면 사람이 좋다가도 싫게 마련이다.
나는 요즘 간병사가 별로다. 며칠 전 면회 온 자식들에게 김치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김치 좀 해오라는 말 같아서 보기 싫었다. 내 손으로 일일이 김치를 담가 먹이던 자식들이다. 자기가 뭐라고 내 새끼한테 김치를 가져다 달래나. 하지만 간병사는 내 자식이라도 되는 듯 다시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복도 끝 방에 할머니가 갑자기 산소포화도가 떨어져서 난리가 났어.”
내가 자기를 맘에 들어 하건 말건 간병사에겐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간병사는 방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었다.
“호흡기를 센 걸로 바꿨는데도 산소 포화도가 올라가지 않았대. 그러니 어쩌겠어.
방금 연명셔틀 타고 떠났지.”
‘연명셔틀?’
나는 처음 들어보는 낱말에 궁금증이 났다. 간병사는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채고 설명을 이었다.
“엄마, 그거 몰랐구나? 노인들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응급실, 중환자실, 그리고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겨 가곤 하는데 이때 타고 가는 구급차를 연명 셔틀이라고 해.”
나는 소리 나지 않을 탄성을 질렀다.
‘아, 내가 그 셔틀을 탄 것이구나.’
나는 왜 그토록 원치 않던 연명이란 셔틀에 올라타게 된 걸까? 나는 언제 이 셔틀에서 내려올 수 있는 걸까? 조금 전까지 그렇게 불타 죽을까 두려워해 놓고, 난 다시 연명 셔틀에 올라탔다는 것에 좌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