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퇴원한 후 나는 하루 세 번 한주먹씩 약을 먹고, 일주일에 두 번 재활운동센터로 운동을 하러 갔다. 다리 힘은 점점 약해져 갔지만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걸어야 화장실도 혼자 다닐 수 있고, 걸어야 물 한잔이라도 스스로 마실 수 있었다. 그 간단했던 일이 자식에게, 남편에게, 요양보호사에게 청해야 가능해졌다. 그러니 한없이 무너져 내릴 때도 걸으려 애써야 했다.
병원 제일 위층에 재활운동센터가 있었다. 그곳에는 나처럼 늙어 몸이 불편한 이, 병으로 몸이 불편해진 환자, 사고로 다친 환자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모여 운동을 했다.
센터에 들어서면 젊고 예쁜 치료사들이 나와 맞아줬다. 손주 뻘 되는 나이들이라 보기만 해도 예쁜 맘이 들었다. 나는 예쁜 그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 운동을 했다. 몸은 맘처럼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애써서 했다.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하고 알려주는 말이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기분 때문인지 정말 운동을 해서인지 운동 후에는 뻣뻣했던 몸에 기름을 두른 것처럼 움직이기가 좀 나았다. 그런데 그건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기억인 거 같다. 어떤 날은 운동을 나면 손하나 까딱하기 힘들게 지쳤다.
그날은 며느리와 함께 재활운동센터에 가는 날이었다. 재활센터는 보통 딸이나 막내가 와서 데리고 갔다. 가끔 두 아이 모두 시간을 내지 못하는 날이면 며느리가 왔다. 나는 점심을 든든히 먹고 며느리를 기다렸다. 며느리의 차가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면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90년대 주택공급 정책으로 단층짜리 집들은 너도나도 지하를 파고, 2층으로 집을 올려 지었다. 우리 집도 그랬다. 작지만 2층 집에 사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새 2층 계단은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편히 오르내리지 못하니 나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계단을 보며 심란해했다. 어찌 되었건 병원에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하니, 계단 난간을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거북이도 이런 거북이가 없다. 우선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게처럼 옆으로 비스듬히 선다. 그리고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다른 다리를 아랫 계단으로 슬슬 밀듯이 움직인다. 처음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거 같지만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발작을 떼는 건 내가 아니었다. 내가 두 손으로 난간을 잡아 버티고 있으면 요양보호사가 내 다리를 하나씩 옮겨줬다. 딸이 옆에 있을 때면 요양보호사가 내 뒤에서 허리춤을 잡아서 지지해 주고, 딸이 쭈그리고 앉아서 다리를 하나씩 옮겨줬다. 딸의 손이 내 발이 되어 주는 것이다. 병신도 이런 병신이 없다. 내 발 하나 옮겨 들지 못하는 병신. 그래서 나는 더 운동에 매달리는 마음이었다. 남편과 자식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운동을 하라고 하면 운동을 하고, 침을 맞으라고 하면 침을 맞는 것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이번에는 차를 타야 한다. 그런데 차 타는 것도 간단하지 않다. 다리조차 들 수 없으니 이번에도 나는 두 손으로 차문을 잡고 아주 조금씩 움직여 본다. 걸음 하나마다 두려움의 연속이다. 땅에 닿은 다리가 나를 버릴 것 같고, 가쁜 숨은 목을 조여 온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어머니, 엉덩이부터 엉덩이부터 밀어 넣어야 해요.”
며느리의 설명대로 나는 몸을 돌려서 차에 앉는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서 바로 하면 며느리가 한쪽 다리씩 손으로 차에 넣어준다. 이런 과정은 차에서 내릴 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걸음은 머릿속에 갇히고, 숨은 가슴속에 갇힌 듯 움직이고 숨 쉬는 것이 힘들었다.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그 고통뿐이었는지 모른다.
힘들게 나선 길이니 나는 열심히 운동치료사를 따라 움직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날따라 몸이 더 힘들었다. 차에서 내려 어찌어찌 계단 앞에 섰는데 전과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 저 계단을 어떻게 오르지?’
내 앞에 있는 계단이 만리장성처럼 높고 길게 느껴졌다. 수십 년을 이 집에서 살았는데 난 이 계단이 낯설고 두려웠다. 힘든 만큼 어서 올라가 집 안에 눕고 싶은 맘도 있었다. 그것만이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희망 같았다.
다시 양손으로 난관을 잡았다. 딸이라면 달려들어 내 다리를 잡든 허리춤을 잡던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며느리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보고만 있었다. 내 입으로 발을 잡아 올려라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계단을 기기로. 다리보다는 팔이, 손이 나았으니 기는 것이 나았다.
“아이고, 어머니.”
처참한 내 꼴을 보며 며느리는 안타까운 소리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꼴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계단 한 계단 포기하고 싶은 순간순간을 견뎌 겨우 현관 앞에 다다랐다. 다 오르고 나니 계단 난간 사이로 골목이 내려다 보였다. 나는 그대로 현관 앞에 쓰러져 누웠다.
“어머니, 들어가서 편히 누우세요.”
“잠깐, 잠깐만.”
나를 일으키려는 며느리의 손을 물리고 잠시 그대로 누워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말했다.
“하나님한테 나 데려가라고 기도해라, 어서 나 좀 데려가라고 기도해.”
“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한번 더 말했다. 나 죽으라고 기도하라고. 그 순간 그건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른답지 않은 어리광이었단 생각도 든다.
딸이었다면 그리 말하지 못했을 거다. 내 말에 딸은 울지 모른다. 그러면 내가 딸을 아프게 했구나 후회했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식이 들으면 아플 속엣말을 며느리에게 한 것이다. 며느리는 딸보다는 걱정을 덜할 것이고, 덜 아플 테니까 말이다. 그건 며느리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며느리는 살림이 힘드네 어쩌네 하는 하소연을 내게 했다. 친정 엄마는 걱정할까 못할 말을 내게 하며 풀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와 딸처럼 살갑지는 않아도 서로가 무엇이 힘든지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이였다. 나는 잠시 후, 그런 동지인 며느리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