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토 Oct 25. 2024

8. 마지막 외출

지금도 그날이 생각난다. 그날은 햇살이 좋았고, 바람이 차지 않아 실내보단 바깥이 좋았던 날이다. 따뜻하면서도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만져준 듯 오랜만에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아들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했다.      




그즈음 나는 걷기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먹기도 힘들고, 숨을 쉬기도 편치 않았다.

음식이 잘 삼켜지지 않고, 목에 가득 낀 가래는 뱉어내지 못해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니 더 누워있게만 되었다. 음식 삼키기가 언제부터 힘들어졌는지 정확하지 않다. 식욕이 없어 먹기 싫었던 건지, 삼키기 힘들어 안 먹은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늙는다는 건 그런 거 같았다. 어디 하나가 망가져, 그것만 고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닌. 어디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 망가져 순서를 정해 하나씩 고칠 수 없는 것. 나는 하나가 망가진 줄 알고, 고치려 애를 썼지만 검사 결과는 거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다시 고민을 하고 병원을 찾아다니는데 어느 병원도, 어느 의사도 이것만 고치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늙으며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늙음이 곧 병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건 나나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엄마, 뭐가 제일 힘들어요?”

딸이 내게 물었다. 

“가래, 가래가 힘들어.”

입 밖으로 뱉어내면 그뿐이던 가래가 나를 그런 고통에 몰아넣을 줄 몰랐다. 걷기 힘든 건 움직이지 않을 땐 괜찮았고, 먹기 힘든 건 먹지 않을 때면 괜찮았다. 하지만 가래는 아니었다. 목 속에 남아 늘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 답답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온몸이 성치 않은 나는 힘주어 그 가래를 뱉어내지 못했다. 나는 가래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가래는 당당하게 내 몸을 차지하려는 듯 내 몸에 쌓이는 것 같았다.    

  

자식들은 나의 이 고통을 없애주려 내과에 데려가 가래 삭히는 약을 지어줬다. 하지만 가래는 생각보다 강한 것이었다. 약을 먹어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약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는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가래 빼는 기계를 사 왔다.

 “엄마, 이걸로 목에 가래를 빼면 괜찮아질 거야. 우리 이거 해보자.”

약으로도 삭혀 없어지지 않고, 자꾸만 쌓이는 가래를 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얇고 긴 호스를 들고 있는 딸 앞에 입을 벌렸다. 딸도 나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딸은 조심조심 내 목으로 호스를 집어넣었다.  요란한 기계 소리가 울리고 호스로 쉴 새 없이 가래가 딸려 나왔다. 그러자 딸은 용기를 내는 거 같았다. 호스는 점점 내 목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딸보다 더한 용기를 내고 그 고통을 참았다. 칫솔질을 하다가도 헛구역을 하던 내게 그건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나고 헛구역질이 났다.      

“엄마, 힘들지? 아무래도 콧구멍으로 하는 게 낫겠어.”

딸은 호스를 콧구멍에 넣어서 다시 해보겠다고 했다. 의료상에서 그게 덜 힘들다고 했단다. 양쪽에서 남편과 아들이 내 손을 꼭 잡고, 올라타듯 내 앞에 선 딸이 호스를 다시 깊숙이 콧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요란한 기계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온다, 나와.”

가래가 더 잘 빠져나오는지 내 손을 잡고 있던 아들이 환호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만, 그만! 나는 틀렸어, 그만해!”

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뒤따라 딸이 더 날카롭게 소리쳤다. 

“엄마, 그런 말이 어딨어. 끝나긴 뭐가 끝났다는 거야!”

나는 딸의 말에 그냥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가족들은 조금만 더 해보자며 나를 달랬고,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죽어라 그 고통을 참아냈다. 막내는 지친 나를 달래며 가래를 많이 뽑아서 좀 편해지실 거라고 했다. 나도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말 편해진 건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재활운동도 하고, 썩션 기계로 가래 빼기까지 했지만 나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나아지지 않는 동안 남편도 점점 기운이 다하는 모양새였다. 어느 날, 남편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이렇게 나아지지 않으니 요양병원에 가서 매일 재활운동도 하고, 치료받는 건 어때? 

집에 있으면 계속 이런 상태로 있는 거잖아.” 

“요양병원?”

나는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요양병원은 말 그대로 요양하며 병을 고치는 병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멀쩡히 걸어서 병원에 들어간 친구 남편은 3개월 만에 죽었다. 교회 원로 권사님 한 명도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이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운동을 시키고, 영양제를 맞춰주고, 썩션 기계까지 사서 가래를 빼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걸.      




“엄마, 저 왔어요.”

막내아들이 현관을 들어서며 소리쳤다. 막내의 활기찬 목소리에 나도 반가워 웃었다.

“우리 엄마 벌써 외출 준비를 마치신 건가?”

“그래, 좀 나으냐?”

나는 남편에게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 달라고 해서 입었다. 나는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 키우고, 돈 아끼며 살림하느라 옷을 자주 사 입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간 유럽 여행에서 버버리 코트 사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막내아들과 집을 나섰다. 아들이 있으니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수월했다. 아들은 언제든 자신이 업어드릴 테니 말만 하라고 했다.     

 

아들과 제일 먼저 간 곳은 은행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만기 된 적금이 있었는데 찾으러 올 수가 없었다. 은행 일을 마치고는 내가 좋아하는 칼국수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음식을 삼키기 힘들었지만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삼키지 못하는 입과 달리 뱃속에서는 시장기를 알렸고, 그러면 머릿속에는 시원한 국물의 칼국수가 떠올랐고, 초고추장에 찍은 회가 떠올랐다. 나는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점심을 먹었다. 부드러운 칼국수라 목을 타고 잘 넘어갔고, 뜨끈한 국물이 가래도 밀어내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멀리 보이는 남산을 봤다. 푸릇한 색이 그렇게 싱그러울 수 없었다. 막내는 그런 내 기분을 알아차린 듯 순환로를 따라 달렸다. 

“엄마, 우리 드라이브하고 들어가요.”

“그래, 그러자. 날씨가 참 좋네.”

“맞아, 요즘 날씨가 참 좋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과 차 안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막내가 내 곁에 있었다. 나는 행복했다.      




다음날 일찍 큰아들과 딸이 집으로 왔다.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날이었다. 나는 아침을 먹은 식탁에 그대로 앉아 종이와 펜을 달래서 메모를 했다. 손이 떨려서 예전 글씨체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쓰면 알아볼 수는 있을 거였다. 나는 적금을 찾아 넣어둔 통장의 비밀번호를 적고, 텔레뱅킹 비밀번호도 적었다. 그리고 아래층 사는 사람들이 내는 월세 내역도 적었다. 그리고 딸에게 서랍장 밑에 있는 내 패물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거 뭐 하게?”

“가지고 와. 내가 너 주려고 해.”

“갑자기 그걸 왜 줘. 나중에, 나중에 줘요.”

딸의 말에 남편도 퇴원하고 와서 줘도 된다고 거들었다. 아무튼 늘 딸 말만 들었다. 

큰아들이 요양병원에서 쓸 내 물건을 차에 싣고, 딸의 부축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남편은 집을 나설 때까지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말 한마디도 곱게 할 줄 모르던 남편의 행동에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나도 그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요양병원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리 않았다. 차를 타고 한강 다리 하나를 건너니 금방이었다. 가운을 입은 간호사와 앞치마를 두른 간병사들이 나와 맞아주었다. 딸은 간호사와 간병사를 붙잡고 연신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하는 거 같았다. 나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그렇게 설레지는 않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체 낯선 곳으로 가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눈을 굴리며 주위를 살피는 네게 아들이 다가왔다. 

“엄마, 요양병원에서 재활운동 매일 하려고 입원하는 거야. 

언제든 집에 오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아셨지요?”

큰아들이 내 손을 잡으며 듬직하게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매일 열심히 운동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은 몸을 이기지 못하는 거 같다. 어쩌면 마음은 몸에 갇혀 있는지도 몰랐다. 열심히 운동을 마친 어느 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의 평범한 외출은 막내아들과 나선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본 남산이, 그날 먹은 칼국수가 모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전 10화 7. 계단 앞에서 무너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