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한 어른이 되었다.
비가 오긴 올까?
주말 낮에 집을 나서는데 오늘 비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다며 남편이 작은 우산을 손에 쥐어주었다.
가방엔 무거운 노트북에 책과 노트, 마실 물까지 챙겨 넣으니 커다란 가방이 꽉 차서 우산까지 챙겨야 하나 5초쯤 망설였다. 남편은 지하철을 타니 가져가라고 손에 쥐어주고 현관 앞에서 망설이는 내 등을 돌려세웠다.
다행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강의가 끝나고 나왔는데 정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빌딩입구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핸드폰만 연신 보고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나와 작은 우산을 펼쳐 혼자 걸어 나왔다.
지하철을 타려면 버스를 한 번 타고가서 갈아타야 하는데 처음 온 동네라 버스정류장 찾기도 힘들다. 길 찾기를 눌러 내 위치를 나타내는 파란점과 일직선으로 그려진 경로가 서로 떨어지지는 않는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커다란 가방 반쯤은 이미 비에 젖어있었다. 오전에 우산을 가지고 갈까 말까 고민하는 내게 남편이 쥐어준 우산이 작아서였다. 아마도 큰걸 쥐어주면 안가지고 갈것같아 그런거겠지.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버스에 앉아 비 오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내리는 빗물로 차창 밖은 내다보이지도 않는데 창밖만 보고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살펴볼 힘이 나지 않는다. 비가 오는 것도 서럽고 모르는 동네에서 눈을 굴려가며 여기가 어딘지 초조해하는 나도 초라해 보였다.
나는 새로운 걸 좋아해서 모르는 동네에 가는 것도 좋아한다. 요즘처럼 스마트폰만 있으면 현 위치며 가는 방법까지 다 검색할 수 있으니 걱정 없이 어디든 새로운 곳을 즐길 수 있다. 근데 오늘은 왠지 낯선 곳에 다 늦은 주말 저녁에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내가 안쓰러웠다.
슬픈 드라마도 아닌데 눈물이 난다.
힘없이 지하철에 올랐다.
다행히 주말 늦은 시간이라 지하철 자리가 군데 군데 비어있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어디부터 다시 해야 하는 걸까?
다시 하면 될까?
지금까지 한 노력은 버려야 하는 걸까?
들었던 강의를 곱씹으며 유명한 TV프로그램에까지 출현했던 유명하신 강사님의 피드백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이어폰을 끼고 봤던 동영상 강의를 보고 또 다시 보았다.
뭐가 틀렸을까?
눈물이 흘렀다.
그냥 너무 아무렇지 않게 예고도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라 나도 놀랐다. 울먹울먹 참고 참다가 흘러내린 눈물이 아니라 그냥 예고 없이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려서 누가 볼까 성급히 손끝으로 눈물샘만 꾹꾹 찍어내었다. 주말 저녁 지하철에서 손등으로 눈을 쓸어내리기엔 너무 사연 많은 아줌마 같을 테니까.
주말이었지만 정말 어렵게 신청한 강의였고 동영상으로 배운 것을 실행하면서 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오늘 오프라인 강의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가족과 지내는 달콤한 주말도 반납하고 노트북까지 싸들고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갔다. 강의는 두 시간 예정이었지만 강사님이 너무도 친절하게 한 분 한 분 피드백을 도와주느라 4시간을 훌쩍 넘겼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두 번째로 질문을 하는 행운을 가졌다. 다른사람들의 질문시간을 배려해 간단하게 한가지만 질문했다. 뒤로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깊고 많은 질문들을 했다. 조바심이 났다. 두번째로 질문하는 바람에 쑥스러워 집중질문을 못해서 궁금증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서다. Q&A가 끝난 수강생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만 떠날 수가 없었다.
모든 수강생의 질문이 다 끝날 때까지 끝까지 남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 더 질문해 볼 생각이었다. 어렵게 한번 더 질문 할 기회가 주어졌고 피드백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제일 마지막으로 강의장을 나온 수강생이 되었지만 수능을 망친 수험생의 기분으로 강의장을 나오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내 결과물을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아들고 머리속이 하얘졌다. 그게 정답일텐데 내 생각대로 고집을 부려야할지 피드백 받은대로 바꿔야할지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규정을 지키지 않는 걸 혐오해서 아마도 한번의 질문기회로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그냥 일어서서 나왔을 거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목표를 정하고 배우는데 필요한 거라면 잠깐의 창피함 같은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내가 너무도 싫어하는 '아줌마티'를 팍팍 내어서라도 부탁하고 용기를 낸다.
놓치면 다시 안 올 것 같은 기회
강의가 끝나고 마무리하려는 강사님께 sos눈빛을 보내며 손을 번쩍 들고 아줌마처럼 손을 흔들어댔다.
그런 모습이 짠한 건지 한번 더 기회를 주셨고 나는 바보처럼 처음 했던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질문을 좀 더 길게 했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 물론 돌아온 피드백도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찜찜하지만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다른 답을 원했던 걸까?
그렇다면 코칭이 필요가 있을까? 내 결과물에 대한 좋은 피드백과 칭찬을 받고 싶었던 걸까?
지하철에 앉아 눈물을 꾹꾹 누르며 곱씹어 보았다. 감사한 일이다. 다행인 거다. 잘못 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그리고 수정할 기회가 빠른 시간에 온 것.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조언을 듣고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
아마도 내 눈물의 의미는 오늘 그냥 에너지가 다 했던 것뿐이다.
아기를 키우면서 아이만 보고 지내다 어렵사리 책 한 권을 출간하고 이제 아이 엄마가 아닌 '나'로 서보려는 때.
회사라는 테두리도 없이 홀로 서기 위해 준비하고 애써온 에너지가 그날 다했을 뿐이다.
그랬던 것 같다.
누가 떠밀지도 않았고 시키지도 않은 일.
엄마가 아닌 나를 찾고 싶어 모르는 걸 배우고 익히고 실행하는 데 빠릿빠릿한 예전의 20대의 내가 아니라서 모든게 버겁고 어설프다.
이것만 잘 넘겨보자고 애써서 넘기면 또 배워야 할 게 쌓여있다. 열심히 하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잘하고 있다고, 애쓰고 있다고 등을 토닥여주길 바랐나 보다.
응원받고 싶은데 어중간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따뜻한 엄마의 응원을 바라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싶었나 보다.
내가 엄마에게 응원받을 입장이 아니라 나이든 엄마의 건강과 삶을 응원해야 할 만큼 나는 어중간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엄마의 응원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지나버렸다.
피드백을 받고 이삼일 고민을 하느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진행하던 일을 버리지 않고 조금 더 해보고 방향을 바꿔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
경단녀에서 다시 사회로 나간다는 건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훨씬 앞선다.
제일 중요한 건 용기일 거다. 이럴 때 써보지 뭐.
무서운 놀이 기구 탈 때나 썼떤 용기 이럴 때 쓰자.
제일 싫어했던 '아줌마'같은 무대포로 당당히 부딪치고 넉살 좋게 웃어넘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