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쏟아지는 비에 당신 생각이 난 것은 비처럼 당신이 밀려와서인가. 우산 하나로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빗물이 내려서 젖는다. 어깨, 손등, 발목. 곳곳에 비로 얼룩진 내 모습은, 어쩌면 당신으로 젖은 나의 모습이겠다.
잘 지냈나요, 당신. 알지 못하는 그대가 당신이 된 것은 늦은 저녁 나를 스치고 간 귀하의 향기 때문이겠지요. 향에 이끌려 당신에게 말을 건넸던 그날, 당황하던 얼굴이 서서히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어가던 그 표정을 나는 기억해요. 내가 당신에게 기울어진 이유는 이름 모를 향수 냄새 때문만은 아닐 테지요. 조심스럽게 이름을 묻던 목소리. 마주 보지 못하고 떨리는 눈동자. 애꿏은 머리카락만 만지던 손가락. 그것들 또한 담겨있겠습니다.
비가 와서 당신이 떠올랐어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어느샌가 당신을 그리네요. 흠뻑 잠겨버리는 것이 아닌, 천천히 알 수 없게. 그렇게 당신이 나에게로 스며들어요.
잘 지내나요, 당신. 나는 잘 지내요. 오늘 같은 때면 당신도 나로 배어들까요. 그러면 온통 물들어도 괜찮은 날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