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40분.
집을 나서려는데 어제 밤부터 내리던 겨울비가 아직도 내린다.
다행히 산행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의 안개비 수준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결빙에 대비해서 규정속도로 달린다.
비교적 이른 시간인데도 영동고속도로에는 벌써 많은 차들이 역시 규정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좀 운전이 불편하긴 했지만 아직 비가 내린다는 것이 한편으론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지에 겨울비가 오면 고산엔 눈이 온다는 믿음때문이다.
모처럼 설경을 볼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아니나다를까 고속도로를 나와 지대가 조금 높은 국도에 들어서자 벌써 비는 눈발로 바뀌어 있고 제설차량이 염화칼슘을 뿌리며 앞서가고 있다.
제설차량을 뒤따라 가는 덕분에 안전하게 운두령에 도착했다.
예정시간보다 10여분 늦은 아침 8시다.
간단히 준비를 하고 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계방산 산행의 기점인 운두령 등산로 입구다.
운두령(雲頭嶺)은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과 홍천군 내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해발 1086m이다.
덕분에 계방산을 겨울산행 명소로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저지대에서 내리던 가랑비가 해발 1000m 산길에서는 싸락눈으로 바뀌었다.
산죽에 살포시 쌓인 눈도 정겹고, 미처 떨구지 못하고 있는 제법 고운 가을색 단풍잎에 핀 설화도 정겹다.
마치 그 모습이 튀김옷을 입혀 놓은것 같다.
역시 겨울 산행은 눈이 내려야 제멋이다.
아직 퇴색되지 않은 채 매달려있는 단풍잎들이 마치 늦가을을 연상케 하는 눈내리는 등산로는
이른시간이라서 산객이 없어 약간 으스스 할 정도로 한적 했다.
그렇지만 그 으스스 함이 참 좋았다.
계방산 산행은 1080m의 운두령에서 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리 가파른 구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겨울산행지로 각광을 받는 산이다.
으스스한 산길을 사방사방 걷기 시작한지 2시간만에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망은 없고 온통 밀가루를 뒤집어 쓴 백색 풍경이다.
금방 신선이라도 나타날것 같은 몽환적인 풍경을 앞에 두고 잠시 쉬어간다.
야광나무.
계방산에는 흔치않은 나무인 야광나무가 있다.
하얀꽃이 수북하게 피면 밤에 빛을 내는것 처럼 환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밤에 빛을 내면 신비스러울까?
아니면 오싹한 기분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계방산은 한자로 쓰면 계수나무桂, 꽃부리 芳자를 쓴다.
계수나무가 많아서 계수나무 향기가 나는 산이라는 뜻이란다.
가루눈은 흡사 밀가루 같았다.
그래서 온통 밀가루를 뒤집어 쓴 풍경이 연출되었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오는 풍경과는 또다른 풍경이다.
눈꽃도 아니고 상고대도 아닌 풍경.
환상적이라기 보다는 신비스런 풍경이다.
그런 풍경속을 홀로 호젓이 걷는다.
아니 호젓하다기 보다는 으스스 했다.
어린시절 해질녁 들판길에 서 있는 기분이 소환되었다.
그 시절 나는 땅거미지는 시간에 으스스한 들판길 걷는 기분이 너무 좋았었다.
으스스함이 왜 아늑함,안온함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도 고된 농삿일이 끝나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될 뿐이다.
계방산 정상.
11시 10분
거리로는 4.1m, 산행시작 3시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계방산 산행은 3번째이지만 정상은 두번째다.
7년전 아내와 왔을땐 눈이 없어서 겨울의 운치를 맛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설경을 만끽할 수 있는 대신 조망이 없다.
또 한번은 혼자 대중교통으로 왔다가 시간이 늦어서 중간에 되돌아와야 했다.
이래저래 2%부족한 산행이 이어지고 있다.
계방산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겨울 산행지다.
바위가 많지 않아서 비교적 위험하지 않고 높은 산이기때문에 눈이 많아서이다.
높이가 1577m로 남한에서 한라산,지리산,설악산,덕유산에 이어 다섯번째로 높은 산인 계방산의 정상은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다.
그대신 맑은 날이면 조망은 좋은데 오늘은 그도저고 아니다.
더군다나 높은 산답게 눈보라가 심해서 정상에서는 지체할 겨를도 없이 바로 하산해야 했다.
시계 제로...
그래도 정상의 묘미는 조망인데...
올라갈땐 호젓했는데 ...
대표적인 겨울 산행지답게 전국의 등산객이 모두 이곳으로 온것 같다.
아무튼 줄지어 올라오는 산악회 사람들을 피해서 내려오는 것은 또다른 스트레스였다.
계방산에는 유독 괴목이 많다.
산이 높아서 바람이 세고 기후변화가 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얀 숲
가루눈은 삭막한 겨울 숲을 동화속 같은 하얀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자작나무 숲에라도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참 특이한 겨울 풍경을 즐기며 걷다보니 어느새 운두령이 가까워지고 있다.
5시간 반만에 산행을 마무리 했다.
계방산이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고도가 높은 운두령에서 오르기 때문에 관악산 오르는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몇 년 전이었던가.
눈오는 날 대중교통으로 왔다가 너무 늦어서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 왔는데 홍천으로 가는 버스가 끊겨서 무척 애를 먹었었다.
눈이 제법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마땅히 택시를 부를 곳도 없어서 히치하이킹을 해야 했는데 눈오는 날 그것도 저녁 산길에서 배낭 맨 덩치 큰 남자를 태워줄 사람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도 지나가는 차마다 열심히 손짓을 했다.
눈은 오고 어둠은 내리고....
히치하이킹을 체념하고 민가에라도 들어가 태워다 줄것을 사정해 볼 요량으로 걷고 있는데 저만치서 또 승용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특별히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또 손을 들어보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
차가 서고 중년의 부부인듯한 분들이 특별한 말도 없이 타기를 권한다.
홍천 버스터미널까지 간다고 했더니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안산서 왔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들이 이촌동까지 가니까 거기서 4호선을 타면 되겠다고 같이 가자고 한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 해본 히치하이킹이 완전 횡재였던 추억이 있는 산이다.
그 아프기도 하고 기분 흐뭇하기도 했던 추억때문에 오늘은 대중교통을 포기하고 새벽 일찍 승용차로 왔다.
운두령 휴게소에는 일찍오지 않으면 주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악회들이 오기전에 좀 호젓하게 다녀오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올라갈때는 계획적으로 되었다.
아마도 10등 이내로 오르기 시작했을것 같다.
그러나 내려올때는 끝없이 줄지어 올라오는 산악회 사람들 때문에 호젓하기는 커녕 짜증이 났던 산행이 되어버렸다.
산행코스:운두령 ㅡ전망대 ㅡ정상 ㅡ원점회귀(5시간 왕복 8.2km)
ㅡ2016.02.14.계방산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