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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Feb 17. 2022

자연의 품에서

집에 하루 종일 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십구 년 동안 갇혀 있던 교도소에 탈옥한다.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다른 죄수를 통해 알게 된 순간 주인공은 오랫동안 준비한 탈옥을 실행에 옮긴다. 

바가 오고 천둥이 치는 어느 날 밤 점호를 끝내고 소등이 되면서 탈옥은 시작된다. 

벽을 뚫고 썩고 더러운 긴 하수구를 거쳐 마침내  팔을 활짝 펴고 비를 맞으며 오욕으로 점철된 자신의 허물을 씻어 내는 듯한 모습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영화의 소재 중에는 억압되고 갇혀 있는 현실을 탈출하여 자유 얻고 갇혀 있는 육신을 해방시키는 영화를 보면 나 자신도 그 억압에서 해방된 듯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작은 공간에 너무 오랫동안 있으면 어떻게 될까?

가끔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군생활에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넓은 연병장과 막사가 있어도 병영 막사는 늘 좁은 공간이었다. 

답답하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이 항시 마음속에 있는 공간이었다. (뭐 탈영이라는 말을 하지 않겠지만)

아직 외출이나 외박은 꿈도 못 꾸던 이등병 시절에 훈련이나 공용 트럭 타고 사역을 나갈 때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은 그림 그 자체였다. 서로 다른 두 공간이 차와 도로를 사에 두고 있다.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유혹이 턱 밑까지 찬다. 다 같은 경험이 있어서 일까?

옆에 앉은 상병이 내 어깨를 툭 친다. 

사회와 단절된 사방을 둘러싼 담과 철조망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세상과 단절된 고립된 삶이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높이의 담과 철조망이었다. 담 쳐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며 나도 새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두 번 해 본 게 아니다. 그렇게 고립된 공간의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고립감과 갇힌 느낌이 다시 일어났다. 평생 겪어 보지 못한 세계적인 팬데믹이 바로 그것이다. 바이러스 의한 공포를 살면서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사람과 접촉으로 전파되는 바이러스는 확산되었고 한 동안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 밖 출입을 삼가였다. 그만큼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와 막연한 죽음을 생각하였다. 

학교는 개학이 연기되고 직장도 웬만하면 집에서 일하기를 권장했다.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나도 내 주변도 다들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밀집이 강한 도시에 비해 농촌은 그나마 괜찮다고 여겨지지만 여기는 작은 사회다. 어디서 누가 병에 걸렸는지 순식간에 퍼진다. 병에 걸린 일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르는 범죄처럼 인식되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유령의 도시처럼 황량한 모습니다. 


마을 회관 방송에도 외출을 자제하라는 소리가 하루에 몇 번 흘러나온다. 

장날 빼고 마을 어른들이 객쩍게 읍내 마실 가는 일은 없다. 그래도 외출을 자제하라는 말이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나도 전염병으로 세상이 멈춘 일에 익숙지 않다. 역사로 배우던 중세 흑사병에 대해서 공부를 했던 일이 있어다. 그때는 그저 마음으로 보다는 머리로 느꼈을 뿐이다. 

생동감 있던 거리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대신 그곳에 그동안 날개를 펴지 못하던 야생동물들이 출현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마스크를 쓰고 사람과 접촉을 피하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공격으로 공포에 빠졌다.

시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과 등지고 산다고 할까 아니면 방관자라고 말해야 하나. 그나마 사람과 접촉이 없는 곳이다. 

답답합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도시에 살던 학교 동창들 전화가 걸려 온다. 참 신기한 일이다. 

시골에 들어오면서 친구들과 관계도 소원해졌다. 나 자신이 사회 열등생이라는 자괴감도 가끔은 들었지만 그래도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일이 나에게는 좋았다. 

자주 보아야 정이 생긴다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니 자연히 멀어진다. 

그런데 안부 전화가 온다. 

"어때?"

"난 잘 지내!"

"심심하거나 적적하지 않아?"

"전혀!"

"요즘 너희는 어때?"

"답답해 미치겠어! 그래서 네 생각이 나더라."

늘 하던 일상이 변하는 순간 사람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속에 관계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그런 일상이 깨지니 답답할 수밖에.


집에서 생활이 대부분이다 보니 나갈 일도 없고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갈 일도 없다. 

가끔 도시에 갔었다. 

어머니를 뵈러 가는 일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전화로 대신한다. 

구십을 바라보는 연세에 전화 목소리는 아직 기운차고 쩌렁쩌렁하시다. 

답답하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다 늙어 늘 집에 있는데 별 문제없으시단다. 늘 하시는 대로 밥 맛있게 드시고 책 보시고 기도 하시고 성경 읽는 일이 전부다. 그래도 아파트 현관 앞에 마스크를 쓰시고 왔다 갔다 하시다가 들어오신단다. 어머니는 참 잘 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하신다. 사는 게 팬데믹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씀드렸다. 

텃밭 가꾸고 집안일하고 책 보고 글도 쓰고 멍 때리며 산다고 했다.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다. 내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아들에게 잔소리 한마디 하신다. 성당을 못가도 늘 성경 읽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대답은 꿀떡 같이 "예!"라고 말씀드린다. 

장날도 없어졌다. 그래도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마스크를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얼른 갔다 온다. 

농협이 운영하는 마트에도 사람이 없기는 매 한 가지였다. 다들 사람 만나지 않고 필요한 물건 사고 곧 장 집으로 향한다. 

역시 공포가 세상을 멈추게 한다. 


나 같은 인간 유형을 빼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디에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녀야 한다. 

세상과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질병 때문에 늘 한결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상이 사라져 버렸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꼭 자신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수 있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마당이 있기 때문이다. 뒷마당은 텃밭이 있다. 매일 텃밭에서 일을 하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앞마당과 뒷 텃밭에서 움직일 수 있기에 견딜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도시에 살고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면 어떨까?

도시에서는 단독 주택에 사는 사람보다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더 많다. 새장처럼 만들어진 아파트가 편리한 점은 있지만 갇혀 있는 새처럼 느껴져 진다. 만약 내가 아파트에 산다면 어떻게 할까?

그리 멀리 가지 않고 아파트 단지를 마스크를 쓰고 산책할 수도 있다. 아니면 식료품을 사기 위해 잠시 잠깐 나가 다닐 수 있는 정도면 나는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 사람들은 거리두기와 불필요한 외출은 삼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고립되고 단절된 삶이 힘든 모양이다. 

조금 내성적 성격이고 지금까지 홀로 지내는 생활을 한 나만큼은 그다지 힘들지 않은 두서너 달을 보낼 수 있었다. 

며칠 전 뉴스에 전염병이 잠시 주춤해졌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그동안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 들과 산과 유원지를 향해 길을 떠나는 모습을 매체를 통해 보았다. 

역시 사람은 움직이고 관계를 맺고 사는 동물이다. 

견디기 힘든 전염병에 사람들의 활동 반경도 좁아지던 시간 동안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가끔 생각해 보는 일이다. 

휴일에 사람들은 다들 뭘 할까?

견디기 힘든 시간은 시골이나 도시나 비슷한 모양이다. 

하늘을 나르는 새들과 바람과 구름만이 경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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