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소란스러운 내면 속 자아 분쟁을 해결하고 통합해 내라는 삶의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음을요. 뒤늦게 이게 내 발달 과업이구나 알아차렸습니다. 글쓰기는 저에게 자기 돌봄에서 시작해 자기 수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저는 이제 제법 다양한 역할 속에서도 건강하고 싱그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검정 본고딕으로 써 내려간 글들은 이제 보니 짙은 초록색을 띄는 듯합니다. 초록일색입니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지. 사람도 풀, 나무랑 똑같아.' 육아휴직 후 가사와 돌봄 노동에 전념하다 마음이 헛헛해질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하던 혼잣말입니다. 저는 육아휴직이 아니라 유학휴직을 쓰고 싶었습니다. 대신 열매라고 할 수 있는 딸을 얻었으니 져버린 꽃을 떠올리며 아쉬워하지 말자 의미 부여하며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치른 출산은 저를 멈춰 서게 했기 때문입니다. 해맑은 얼굴로 뛰어다니는 딸을 보면 흐뭇하다가도 종종 이 시간과 노력이면 박사학위 하나를 땄겠다 싶었고요. 나는 저물었는데, 남편과 딸은 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졌습니다.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사회적 역할이 돌발적으로 보태지면서 깨진 삶의 평온과 급격한 심리사회적 변화는 겪어내기 녹록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개별 경험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각 경험의 의미를 해석한 후 통합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생장점의 마디마다 글을 썼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 글들을 엮어보았더니 제가 초등학교 3학년 과학 수업시간에 가르쳤던 '식물의 한살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나를 한 해 살이 식물에 비유했구나. 일단 꽃이 지고, 열매를 맺으면 별다른 이벤트 없이 고만고만하게 살다가는 인생 말입니다. 이제는 매년 봄, 새로운 싹을 틔우는 여러 해 살이 식물의 관점으로 저를 지그시 바라봅니다. '얼마든지 피고 지고 열리고 떨어져 보자. 봄이 되면 또 새롭게 시작이잖아.' 매해 새로운 싹을 틔우는 여러 해 살이 식물은 뿌리가 점점 두꺼워지는데요,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한 해만 사는 풀과는 다릅니다. 점점 단단해지고 더욱 무성해집니다.
다시 찾아온 초봄의 새싹은 시간이 흘렀다고 저절로 돋아난 것이 아닙니다. 겨우내 인고한을 이겨낸 생명이 온몸으로 틔우는 초록입니다. 여봐란 듯 늠름합니다. 부단히 애쓰고 있는 당신께, 결국은 푸르를 당신께 저의 초록을 건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