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또래 선생님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작년 이맘때쯤 학교 시험기간을 앞두고 둘째 딸아이가 같은 학년 친구인 J와 주말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영상통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대안학교를 다니면서 공부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1학년인데 저렇게 해맑아도 되나 싶어서 잔소리를 몇번 했습니다. 딸 아이는 그때마다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고 저는 도무지 공부하는 분위기 같지 않은 공부를 하고 있는 딸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저를 닮았는지 유독 수학과 과학을 힘들어 하는 둘째 아이는 한동안 과학공부를 할 때마다 저에게 과학이 너무 어렵다는 소리를 자주 했습니다. 수학보다 오히려 과학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과학 울렁증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과학과목과 친해지기가 힘들어졌고 엄마인 저도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저에게 과학책을 몇 번 들고와서 가르쳐 달라고도 했지만 저역시도 고등학교 물리 화학책을 보면 예전에 배웠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잘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말에라도 학원을 다녀야 하나 고민할 만큼 아이에게는 과학이 스트레스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몇달을 고민만 하다가 결국 아이가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같은 학년에 과학을 잘하는 친구와 주말에 줌(zoom)으로 서로에게 과목 선생님이 되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과학이 어려웠던 반면 국어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딸아이가 그 친구에게 국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고 그 친구가 과학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처음에 그런 사정을 몰랐던 저는 주말 마다 친구와 화상통화를 하며 공부를 한다는 아이의 말이 미덥지 않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들이 두어 달 가량 서로의 부족한 과목을 도와주고 가르쳐준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우선 아이의 과학 울렁증이 사라졌고 점점 자신감이 생겨나더니 형편 없었던 과목 점수가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바뀌었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친구 역시 국어 실력이 많이 오르고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두 아이의 품앗이 과외는 저에게 공부에 대한 고정관점을 다시 한번 깨뜨려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화상통화를 하며 웃고 떠드는 것처럼 보였던 딸아이에게 제가 했던 잔소리는 공부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생각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것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간혹 두 딸아이들이 저의 어떤 면에 대해 너무 전통적이고 구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때마다 정신이 퍼뜩 들고 제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아이들에게는 답답하게 보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래 선생님의 도움으로 즐겁게 공부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아이들의 놀라운 힘을 보았습니다.
주중에 학교 기숙사에만 있다보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학원이나 과외를 받기가 어려운 대안학교 고등학생들에게는 또래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재미있게 가르쳐주는 친구의 설명이 그 어떤 스타강사의 강의보다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이러한 또래 교사의 장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학교에서도 ‘또래 멘토링’제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국영수 같은 교과목 뿐만 아니라 악기나 독서 상담 같은 분야에서도 친구들과 더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큰딸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에는 후배들에게 기타 레슨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남학생들에게 딸아이의 기타 멘토링 수업이 인기가 높았는데 매번 인원이 마감될 정도였습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가르친 후배들이 연말 축제 무대에서 기타 연주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딸아이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더 배우게 된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인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발전해 가는 경험을 통해 비단 배움의 내용뿐만 아니라 함께 협력하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까지도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비싼 과외비용 들이지 않고도 과학 울렁증을 극복한 둘째 딸아이가 새삼 기특하고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또래 멘토링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면은 생각보다 다양해보였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아이들이 멘토 멘티 관계를 가지고 일주일에 한시간 정도 생활하는 내용을 나누는 시간이 있는데 보통은 선후배 사이에 멘토 멘티 상담이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처음 올라가면 학점제나 쿼터발표회 그리고 여러가지 중학교와는 많이 다른 학교 생활로 인해 처음에는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일반고등학교에서처럼 정해진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매 쿼터마다 자신의 시간표도 짜야하고 그에 따른 평가와 발표 준비로 스스로 해야합니다. 그런 개인의 학습과정을 어드바이저 선생님이 코칭해주기는 하지만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 다 신경써주지 못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때 선배 멘토의 학교생활코칭은 정말 큰 힘이 됩니다. 딸아이들도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친한 선배 언니들에게 멘토 신청을 했습니다. 선배와 고등학교의 생활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마음까지도 서로 나누기도 했고 선배역시 책임감을 가지고 후배의 학교 생활에 도움이 되려고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멘티였던 후배는 학년이 올라가면 다시 멘토가 되고 자신들이 선배들에게서 받았던 도움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멘토 멘티 활동을 보면 학습과 학교 생활 적인 부분도 있지만 좀 더 구체적인 나눔을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책 한권을 정하고 매주 챕터별로 서로 읽고 느낀 점을 나누는 때도 있었습니다. 보통 친한 선후배 간에 그런 모임이 이루어지지만 꼭 친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선후배 멘토 멘티 관계를 통해 서로 알아가면서 친해지기도 합니다.
공립학교처럼 대안학교에도 대학생 교생들이 실습을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교생 실습의 형태보다는 멘토링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생 멘토링이 있는 때에는 아이들마다 자신이 관심있어하는 학교나 전공 분야를 따라 멘토링을 신청하고 대학생활에 대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생 교생들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대해서 그리고 대학 생활에 대해서 더 기대하게 되고 동기부여를 받는 것 같습니다. 간혹 대학생 선배와 친해져서 계속 연락을 주고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멘토 멘티의 관계를 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졸업한 선배들의 다양한 삶과 생활의 모습을 후배들에게 공유해주는 많은 기회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갭이어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졸업생들의 참여도가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갭이어에 참여하는 졸업생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동기부여를 주기도 하고 각 지역별 학부모 모임이나 전체 학부모 모임때 졸업한 아이들이 초대되어 강연회를 열기도 합니다. 1기 졸업생들로 부터 시작해서 현재는 초등학교 6학년인 10기의 학생들까지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1기나 2기의 선배들은 까마득한 선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학교의 행사가 있는 때에나 멘토링에 선배들이 자주 와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자신들의 삶을 나누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흐뭇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