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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선생 Nov 12. 2019

미역이 문제였을까?

수능의 추억

아이들의 눈빛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 있다. 12시 28분. 수업에 지쳐 졸린 눈을 비비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교실에는 활기와 긴장감이 돈다. 맞다. 급식 시간 2분 전이다. 생 텍쥐베리가 한국인이었다면 어린 왕자는 조금 다른 내용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급식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먹는 게 더 좋을 거야.
이를테면, 급식 시간이 12시 30분이라면 난 12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12시 28분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급식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게 되겠지.
급식을 아무 때나 먹으면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잖아.
올바른 의식이 필요하거든.”

급식 시간을 기다리는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오늘 메뉴는 닭백숙. 나도 12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딩동댕동”


시간이 됐다. 행복해질 순간이다.


한껏 기대를 하며 급식판을 들었다. 그때 알았다. 오늘 메뉴가 조금 바뀌었다. 찹쌀죽 사이에 살포시 닭다리 하나가 올려져 있기를 기대했는데 멀건 닭 육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늘 메뉴가 바뀐 건가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앞에 계신 선생님께 투덜거렸다.

“그러게요. 찹쌀밥이 따로 나왔네?”

그때 옆에 계신 원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제 수능이잖아.”
“그게 왜요?”
“죽 쑤면 안 되니까!”
“아....”


수능이구나. 교사라지만 중학교는 입시와는 조금 떨어져 있어 크게 와 닿지 않았었다. 인생의 큰 허들 앞에 선 이들은 작은 데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추억이 있다. 잊고 살던 수능의 기억. 15년이나 지났으니 이젠 추억이라 불러야 할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정확히 15년 전 오늘, 수능을 이틀 앞두고 우리 가족은 외식을 했다. 동네 꽤 괜찮은 고깃집에서 평소에 안 시키던 메뉴를 시켰던 것 같다. 당신들의 한 마디가 내게 부담이 될까 부모님은 조심하며 식사를 했다. 나도 떨리긴 했지만 담담하게 마음먹으려 노력했다.

   식사는 맛있었다. 좋은 메뉴라 그런지 손이 가는 밑반찬도 많았다.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던 내가 한 곳에 손이 닿자 아빠가 다급하게 말했다.

“먹지 마라.”

미역이었다. 잠시 멈칫한 후 젓가락을 옮겼다. 무뚝뚝한 아빠의 한마디. 내겐 가장 큰 격려가 됐다.


 덕분이었을까? 나는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렇게 쓸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난 미역을 먹지 않았지만, 그것이 미신이었음을 입증하듯 입시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변명은 여러 방식으로 가능하다.


1. 피로로 인한 집중력 저하설


수능 전 날 일찍 잠들기 위해 10시부터 누웠는데 심장이 쿵쾅거려 잠이 들지 않았다. 집 안은 10시부터 고요했다. 평소 밤 늦게까지 크게 들리던 TV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 지독한 적막이 문제였다. 내 안부를 살피러 밤새 거실을 서성거리던 엄마의 발자국 소리는 큼직하게 내 귀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수능 시험장으로 향했다. 피곤은 2교시부터 몰려왔다.


2. 초유의 출제 오류 피해자 설


피곤한 몸으로 언어영역 시험을 봤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생각보다 문제가 쉽게 풀렸다. 애매한 13번 문제만 빼고 다 풀고 나니 15분이 남았다. 13번 문제는 나를 15분간 괴롭혔다. 결국 3번을 답으로 고르고 답안지를 제출했다.

수능이 끝나고 뉴스를 봤다. 언어 영역이 어려웠었다고 한다. ‘나이스’. 시험이 어려우면 변환 표준점수에서 유리하다. 13번 문제는 정답률이 20%가 안 된다고 한다. ‘나이~~~ 쓰!!’ 난 맞췄다. 안도와 기쁨이 흘렀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분위기가 묘했다. 5번도 복수 정답이라는 학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에이... 설마. 수능에서 복수정답이 말이 되나.’ 2주가 지나자 저명한 국문과 교수들이 5번도 정답이라고 방송에서 인터뷰를 한다. ‘아.. 그래도 수능에서 한 번도 복수정답이 된 적이 없는데 될 리가 없어.’

한 달 후, 13번은 정답이 2개가 되었다. 내 변환 표준 점수 5점은 사라졌다.


3. 치아 부상설


소수설이다. 언어영역 시험을 마치고 초콜릿을 꺼냈다. 아침에 엄마가 챙겨준 간식이다. 당이 부족하면 두뇌회전이 느려지니까 꼭 챙겨 먹으리라고 생각했다. 꺼내놓고 보니 아주 단단하다. 냉동실에 오래 두었나 보다. 세게 깨물었다.

“아악.. 이게 뭐야. 플라스틱이잖아?”

엄마가 챙겨준 건 초콜릿이 아니었다. 초콜릿 모양의 손거울이었다. 덮개로 덮여 있을 땐 영락없는 초콜릿이다. ‘잘 보라’는 마음으로 건네준 것이다. 혼자 웃었다. 하지만 당 충전이 되지 않았기에 수학 시간에 두뇌 회전은 빠르게 되지 않았고 많은 문제를 틀렸다.

초콜릿? 손거울!

지금은 농담하며 말할 수 있는 수능의 추억이다. 당시에는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없었기에 인생이 끝난 것처럼 힘겨웠는데 지나 보면 덕분에 또 내가 이렇게 밥벌이하며 살고 있나 싶기도 하다.


수능은 오롯이 혼자서 그 고독 전부를 짊어지며 치러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역 하나, 초콜릿 하나에 담긴 마음이 모여 시험장으로 갈 수 있었음도 기억하면 좋겠다. 씩씩하게 시험장 문을 나서면 시험은 하나의 기억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가족 모두의 추억이 될 테니까. 그때는 시험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런데 급식에 도토리묵은 왜 안 바뀌었을까? 그것도 미끄럽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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