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하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했던 건 나인데 말이다. 철학과를 가고 싶다는 태하는 논리를 굉장히 따진다.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제표에서 논리학이 있는지 제일 먼저 살펴볼 정도였다.
태하가 읽는 책들을 나도 읽어야겠다. 관심 없는 분야의 책이지만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엄마도 읽어보라며 준 <플란톤의 대화편 >은 1장만 겨우 읽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 형식이 흥미롭기보단 태하가 쏟아냈던 질문 같아서 아찔했다. 이런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철학과를 가고 싶다는 아이의 머릿속이 궁금할 따름이다. 매사에 따지듯이 질문을 하고 의문을 갖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뭘 하라고 하거나 안된다고 할 때마다 "네."라고 바로 답하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명을 하다 보면 진이 빠지고 힘들었다.
이럴 땐 아들 셋 키우신 시어머니랑 통화를 한다.
"똘똘한 아이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가 하라는 데로 '예, 예.' 하면 그 순간은 쉽겠지. 그건 자기 생각이 없다는 거다. 아이가 '왜'라고 묻는 것은 생각을 하는 거니 얼마나 대견하니. 난 태하가 너무 멋지구나. 네가 많이 힘들겠다.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
어머니의 말씀에 많은 위로가 됐다. 순간은 편할 테지만 아이의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 줘야 된다면 어떨까. 그런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결국엔 독립된 인간으로서 잘 자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깐.
아들의 책상
철학이 논리와 연결이 되는지도 몰랐고 수학을 재밌다며 푸는 이유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정확성과 논리성을 따지는 태하에게 수학이 딱이었던 것이다. 시험기간에도 다른 과목은 거들떠도 안 보고 수학만 해서 잔소리를 늘어놨는데 나의 무지다.
태하의 책꽂이에 있는 책부터 읽어야겠다. 그런데 자꾸 내가 읽고 싶은 책에 눈이 가고 신간도 사게 되며 또 다른 책탑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