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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 만들어 놓은 조깅코스를 따라가다가 정신을 잃어버렸어요. 가스에 취한 듯 이내 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고. 제가 기억하는 건 이게 다입니다.” 마동은 다시 커피 잔을 돌리며 말했다. 류 형사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병원에 진찰을 받아 보셨습니까? 왜 갑자기 쓰러졌는지 쓰러진 후에 후유증은 없는지 말이죠.”
“아니요, 가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것 때문에 조짐이나 이상 징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아서 진찰은 받지 않았습니다.”
류 형사는 이 말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시간은 조금씩 계속 흘렀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문명이 매일 무엇에 의해 조금씩 파괴되어 가는 것 같군요. 하긴 인간이 제일 많이 자연스러운 모습을 파괴해 버리는 종족입니다. 돈이 된다면 가차 없이 모든 것을 파멸하고 잠식하는 게 인간이니 이제 벌을 받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지요.”
류 형사는 컵을 들었지만 형사의 컵 안에는 커피도 얼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동은 그런 류 형사를 보며 자신에게 준다며 들고 온 음료를 손으로 밀어 류 형사에게 권했다. 류 형사는 눈인사를 하고 커피 잔을 들고 빨대를 빼버린 후 커피를 빠르게 마셨다.
“이 기이한 현상이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결국엔 우리 경찰은 그 말라버린 시체에 대해서는 어떤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앞으로도 단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먼지가 되어버린 시체를 가지고 단서를 잡아내는 기술력도 아직 없습니다. 미제사건으로 영원히 남을 것 같습니다. 현재 이 도시에는 미제사건이 일 년에 삼, 사천 건 정도가 늘 있습니다.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사건이 늘 쏟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지방검경이 모두 이 사건에 매달리고 있어서 미제사건이 대략 800여 건이 더 늘어날 겁니다. 본청에서 내려온 정부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한 방향으로 조사를 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사건과 관계없는 움직입니다. 본부에서는 무조건 그들에게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은 사건의 해결과는 무관하게 조사를 하고 있어요. 뭔가 이상합니다.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이런 꺼림칙한 기분은 처음입니다.”
와그작.
“속옷을 잔뜩 먹고 죽은 남자의 부인은 정신이 웅덩이에 버려져 건져내도 축축한 채입니다. 아직 한창이고 얼굴도 미인이던데 말이죠.” 류 형사는 부인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류 형사는 입속으로 얼음을 다 털어 넣었다.
와그작와그작.
단서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 풀지 못한 살인에 대해서, 정신이 나가버린 시체의 부인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항변이라도 하듯 류 형사는 얼음을 큰 소리로 깨물었다. 저렇게 힘 있게 얼음을 씹다가 치아가 나갈 것 같았다.
마동은 류 형사에게 봉투를 하나 건넸다. 류 형사는 마동이 꺼낸 봉투에 시선을 두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류 형사는 봉투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었다. 봉투를 보니 신장이 망가진 채로 태어나 병실에서 아빠를 절박하게 부르는 딸의 모습을 뒤로하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크고 맑은 눈동자의 수빈이를 생각하니 류 형사의 눈동자도 심하게 떨렸다. 류 형사는 봉투를 거절하고 싶었지만 류 형사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존심을 지키자니 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고통에 찬 수빈이의 얼굴이 류 형사의 마음을 덮쳤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견뎌내고 있는 수빈이를 생각하니 자존심 같은 것은 쓰레기봉투에 구겨 넣고 싶었다.
류 형사는 얼굴을 들어 마동을 바라보았다. 앞에 앉아있는 이 청년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의 성격과 스타일을 어느 정도 간파해 낼 수 있다. 물론 경력에 따라, 경험에 쌓인 사람에 한해서지만.
류 형사는 평소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자신 앞에 앉아있는 마르고 표정이 없는 이 청년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점점 더 깊은 기이한 의문점만 들었다. 청년은 깊은 상실감을 지니고 있으면서 사람들과는 다른, 너무 선명한 우주공간 속의 맑음도 보였다. 생명수라고 불리는 암반의 저 끝에서 나오는 깨끗한 물처럼 신비로운 맑음이 이 청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맑음은 하지만 무서운 것이다. 너무 맑고 깨끗해서 깊이를 알 수 없었고 관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비논리적이었고 비현실적이었다.
미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종류의 희망은 그 속에 있었고 확실한 냉철함이 ‘맑음’ 속에 있었다. 이 청년의 무표정 너머의 세계를 류 형사는 직관으로 꿰뚫어 보려고 해도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있어서 유력한 용의자다. 하지만 의심을 접었다. 류 형사에게 마동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인간이 지니고 있지 못한 본질을 지닌 영역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청년의 주위에 감돌고 있는 기이한 기류를 류 형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표정하고 기이한 청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사고가 희미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마동의 얼굴과 대면하고 있다가는 생각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류 형사의 한 손은 이미 봉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봉투를 쥐었다.
“”형사님, 오늘 밤에 떠나려고 합니다. 몸이 보기보단 좋지 않습니다. 격리되어 있는 전문병원에서 요양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식어버린 커피와 차갑게 쏟아지는 비와 무서운 소리를 내는 천둥과 충격적인 번개는 여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마동은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할 때는 몰랐지만 식어버린 커피는 겨울을 봄으로 착각하고 잘못 나온 잡초를 으깬 맛이 났다. 잠시의 틈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