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끔 단편선 - 012
내가 살던 작은 동네에는 마을 크기에 맞지 않는 터널이 있었다. 덤프트럭이 족히 두 대는 같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터널이었다. 나는 학교에 갈 때면 꼭 이 터널을 지나서 가곤 했었는데 거길 지나가고 있으면 뭔가 내가 살아 보지 못했던 어떤 공간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그 터널로 등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터널이 좀 크고 깊어야지. 막말로 누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 그 터널을 돌아서 안전한 길로 가라는 엄마의 말에 매번 나는 ‘네.’라고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매번 터널을 사용해서 학교로 갔다. 아마 엄마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터널을 탄다고 해서 학교에 일찍 도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터널 내에는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스프레이로 섹스라던가. 고추라던가, 가슴이라던가. 음흉한 단어들이 적혀있었고. 가끔은 여자의 알몸 사진 같은 것도 그려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졌지만. 다른 곳에서는 못 보던 꽃이 피어있던 적도 있었고, 처음 보는 새나 동물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동굴처럼 박쥐 같은 게 있는 걸 기대하긴 했지만, 박쥐는 터널에서 살지 않는다.
가끔씩 비가 오면 나는 터널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곤 했다. 우산이나 우비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 공간만이 주는 아늑함이 있었다. 시험을 망쳤을 때도. 반 아이들과 싸웠을 때도. 가끔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 나는 터널에 앉은 채로 하염없이 밖을 쳐다보았다.
터널이 이토록 커다랗게 만들어진 이유는 공사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이 재개발 단지로 지정되었을 때. 건축 자재를 옮겨야 했기에 이토록 커다란 터널을 산에 뚫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재개발은?이라고 묻는다면 아직까지 시작하지 않았다. 터널을 지나간 덤프트럭 따위는 없다.
하루는 민재 무리가 터널에 대해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커다란 터널 말이야. 밤에 가면 귀신이 나온대.” “아냐, 내가 들은 건 매일 저녁마다 누군가 거기 서 있다는 거야.” “엄마가 그러는데 그 터널에 나쁜 아저씨들이 살고 있다던데? 그래서 밤늦게 거기 돌아다니면 인신매매 당한대.” 새빨간 거짓말들이다. 터널 안에 귀신같은 건 없다. 터널 내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 애초에 그런 공간 따위는 없으니까. 이건 내가 확인해 본 사실이니 믿어도 된다. 하지만 누군가 서 있다는 건 확인할 순 없었다. 나 역시 터널에 살고 있진 않으니까.
커다란 터널에 대한 괴담은 생각보다 빨리 퍼져 나갔고, 결국 어쩌다 보니 엄마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엄마는 나에게 터널에 대해서 말했다. “엄마가 거기 위험하다고 했지? 들리는 소문들이 다 흉흉하더라.” 나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거기에 나쁜 아저씨들이 살고 있다면, 거기에서 누군가 인신매매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면. 그 사람들이 나쁜 거잖아. 그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해야지. 왜 터널 탓을 해야만 하냐고. 하지만 나는 다시 엄마의 말에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터널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터널 쪽으로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등교할 때도, 하교할 때도. 가끔은 친구들과 터널에서 만나서 놀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나쁜 공간으로 치부되는 것이 싫었다. 며칠이 지나자 터널에 대한 얘기는 아이들의 주제에서 사라졌다. 내가 원했던 것처럼 터널이 안전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유행이 지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입방아에 오른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마음껏 비하당하고, 구석으로 몰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힌다.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 잊히는 것. 두 가지 중에서 더 슬픈 것은 무엇일까. 아무튼 내가 터널에게 해줘야 할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고생했어.”
터널은 다시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주말이 지나면 터널에는 새로운 낙서들이 새겨져 있었고, 수요일이 넘어가면 낙서는 사라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처럼 학교를 마치고 터널로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뭔가 기시감이라는 것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그 단어를 몰랐기에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별 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이 공간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그러던 중에 오늘 아침에 봤던 ‘X발’이라는 글자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세미 같은 것에 비눗물을 묻힌 채로 “X발‘이라는 글자를 지우고 있었다.
”씨발. 누가 도대체 이런 걸 써놓는 거야. “
’ 씨발‘이라는 단어를 지우며 ’ 씨발‘이라고 말하고 있는 남자. 그는 파란색 옷에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터널에는 못 보던 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만 열리는 문인지. 아니면 지하도로 통하는 문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 보는 문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민재 무리가 말했던. 터널에 사는 사람이 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남자가 뒤를 돌아보고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불안함 감정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꾸벅 – 인사를 해버렸다. 그는 섬찟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이렇게 말했다.
”안녕? 너는…… 가만 보자. 매일 여기로 학교 가는 애구나. 여기 앞에 모산 초등학교 다니지? 체육복 들고 가는 걸 봤다. 지금 집에 가는 거니? 집은 어디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 발자국 더 나에게로 다가왔다. 기시감이 점점 커졌다. 심장이 콩닥대고, 손발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 뛰어 ‘
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아저씨가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뒤에서는 ’ 시발‘이라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아니, 확실히 모른다. 그냥 나는 죽도록 뛰었기 때문이다. 죽도록 뛰고 뛰어서, 우리 집 안으로 들어와서야 나는 못 쉬었던 숨을 몰아 쉬었다. 엄마는 티브이를 보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민재의 말은 사실이었다. 터널에 사는 사람이 있었고, 터널에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은 진짜 인신매매를 할지도 모른다. 터널 안에 살고 있다면 매번 누군가를 봤을 테니까. 몇 시에 들어가서 몇 시에 나오는지. 어쩌면 나보다 터널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잘 알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의 집은 거기니까. 그리고 나는 문득 누군가 ’ 뛰어 ‘라고 말해줬던 것은 누구였을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아니 확실했다. 그건 아마도 터널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나에게 이상한 불안감을 줬던 것도, 그 남자에게서 도망치게 해 줬던 것도 분명 터널이었을 것이다. 이전에 내가 터널에 대해서 변호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가? 터널에 있는 사람이 나쁠지언정, 터널은 나쁘지 않다고. 아마도 그 녀석이 날 살려준 건, 내가 그를 끝까지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 뒤로 그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후로 터널에 가지 않았으니까. 무서웠냐고? 그래. 무서웠다. 다시 그 남자를 만난다면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성인이 된 지금도 터널 근처로는 가지 않는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우산이나 우비가 없어도 나는 터널을 찾지 않는다. 어두운 밤이 되면 나는 터널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터널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좋아하는 쪽에 속했다. 가끔씩 터널을 지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거기엔 그 음침한 남자는 살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만 열려 있을 뿐이다. 나는 호기심에 그 문을 향해 들어간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찾는다. 그리고 스위치를 켜고 주변이 확 – 밝아지면. 그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