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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욱 Feb 22. 2024

한평생

힐끔 단편선 - 014.

 여기, 한평생 동안 책을 읽어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순간도 책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서 똥을 쌀 때도, 출근이나 퇴근을 할 때도, 회사에서도 틈이 나면 책을 읽었고, 자기 전까지 책을 놓지 않다가 책을 든 채로 잠이 들어버리는 그런 삶을 몇십 년이고 반복해 왔다. 그는 책을 읽는 걸 사랑하는 만큼 모든 장르를 좋아했는데,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이나 에세이, 시는 물론이고, 지식을 탐구하는 인문, 철학, 경제 등등의 분야까지 모조리 읽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번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아 넣을 때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했고, 그럴 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가서 읽고 싶었던 책을 구매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과연 죽을 때까지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이따금씩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고, 진시황이 영원한 생명을 원했듯, 그 역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면 끝없이 펼쳐지는 책들을 읽고, 읽고, 읽어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소설을 읽고 있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소설이 너무 재미가 없었냐고? 아니, 아니다. 그는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책을 그만 읽을 사람이 아니다. 그야말로 정말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글자들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더니 점점 책에서 떨어져 나가서 어느샌가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책은 던져버리고 곧바로 서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한 권씩 꺼내서 읽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글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늘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악 -


 하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은 그의 아내였다. 아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보이는 그대로라며 책에서 글씨가 날아다닌다는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면 글자들은 모두 책에 빼곡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안과에 가야 하는지 뇌를 검사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일단 큰 병원으로 가기에 이른다. 시력검사를 하고 CT와 MRI를 찍으면서도 그는 책에 대해서 생각했다. 앞으로 책을 읽지 못한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집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해보세요.”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정상? 책에 있는 글씨가 날아다녀서 책을 읽지를 못하는데 정상이라고? 그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몸져눕게 되었다. 어떤 순간에도 함께 했던 책이 없으니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어도 재미가 없었다. 똥을 싸도, 일을 해도(이건 원래 재미가 없긴 했지만), 잠을 자는 것도 재미가 없고 따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참에 조금 쉬어 보는 건 어때요?”


 아내는 남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책 읽는 거 말고 다른 걸 해봐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책 읽는 것 외에 다른 것 밖에 할 수 없었기에. 그는 아내와 시간을 더 자주 보내기로 약속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관광지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조금씩 책에 대해서 잊을 수 있긴 했지만, 순간순간,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는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다시 읽고 있던 소설을 펼쳐보았다. 여전히 글씨는 춤을 추고 있었고, 이내 흩어져 버렸다. 그는 책을 끌어안은 채로 소리 없이 울어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아내는 다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당신이 글을 써보는 건 어때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게 글을 쓸 수 있을 리 없어. 무엇보다도 난 작가가 아니라 독자잖아.”


 “꼭 작가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건가요? 책을 읽는 것에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듯이 글을 쓰는 것도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남자는 고개를 들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당신이 직접 소설을 써보는 거예요. 당신이 읽고 싶었던 내용들을 직접 쓰며 읽어 내려가보는 거예요.”


 남자는 그날 이후로 아내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밥을 먹으면서, 산책을 하면서,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자기 전까지 내가 직접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남자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는 이전에 읽고 있던 소설집을 펼쳐보았다. 다시금 글자들은 두둥실 떠오르더니 춤을 추며 떠다니기 시작했다. 남자는 곧바로 펜을 집었다. 그리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글자들을 하나씩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이건,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글을 쓰고 있었다.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을 조합해서 문단을 만들었다. 캐릭터를 만들고 작은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읽고 싶어 했던 소설을 점점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그는 기다란 장편 소설 하나를 완성했다. 아내는 그를 꼭 안아주었고, 그 역시 아내를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책을 좋아했던 남자는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는 남자가 되었지만, 슬프지 않았다. 그는 결국 글을 쓰는 남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 년 동안 썼던 장편 소설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 방대한 이야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 한평생 동안 책을 읽어온 남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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