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점, 와인, 코리빙하우스 (24분 55초)
서점, 와인, 코리빙하우스라는 세 가지 단어를 포함하여 24분 55초 동안 써낸 단편 소설입니다.
처음부터 이곳을 원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더 서울에 머무를 수 있을지 가늠이 안 가서 택했다. 베를린에서 살던 집도 정리하지 않고 한국으로 들어왔고, 여기 생활에 꽤나 잘 적응 중이다. 방이 조금 좁긴 하지만 이 정도면 살만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공유 주방과 운동시설 그리고 영화관이었다. 한국에 친구가 몇 없던 나는 이 코리빙하우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직업도 다양했고, 나이도 모두 달랐다. 우리는 가끔 주방에 모여 함께 저녁을 먹었고 안부를 물었다.
오늘은 서울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저녁때를 놓쳤고, 늦은 밤이라 공용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파스타를 요리해 식탁에 올려놓고 이제 막 먹기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언니는 왜 한국에 왔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진주가 인기척도 없이 눈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26살이고, 서점에서 일한다는 간단한 정보정도만 안다. 그것도 6층 친구 아영이가 건너 알려준 것이었지만. 진주와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어도 대화를 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몇 차례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고개로만 반응을 했을 뿐 목소리조차 낸 적이 없었다.
“그냥. 한국이 좋아서? “
“저도 베를린 가보고 싶어요.”
“가면 되지 않나요? “
“외국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쿨하고 쉬워요?”
외국 사람.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녀가 냉소적인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공격적인 어투로 말을 하는 건 달랐다. 나는 말문이 막혔고 우리는 한참을 정적 속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진주도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은 친절하고 따뜻하지 않았다. 이 친구가 나한테 왜 이러나 생각하던 와중에 아영이가 와인 세 병을 품에 가득 안고 들어왔다. 그리고 공기의 온도를 파악하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진주, 밥 먹었어? 소피아는 파스타 직접 한 거야?”
진주는 아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주방을 나섰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르고 묵묵히 파스타를 입에 한 입 넣었다. 면이 조금 식었고 딱딱했지만 소스 향이 잘 베어 맛이 좋았다. 아영은 굳은 표정의 나를 보다가 레드와인 하나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소피아, 오늘 이거 같이 마실까?”
“좋아. 고마워.”
“혹시 옆 골목에 있는 고깃집 알아?”
“응, 알지. 지나가다 봤어.”
“진주 남동생이 그 앞에서 사고를 당했어. 웬 남자가 온몸에 살을 물어뜯었다나 봐.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뉴스에도 나왔고.. 아무튼. 그래서 지금 좀 힘든가 봐. 소피아가 이해해. “
아영이는 담담하게 말하며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를 땄다. 나는 파스타 먹는 것을 그만두고 아영이가 따라주는 와인을 바라봤다. 검붉은 레드와인이 투명한 와인잔에 꼴꼴꼴 소리를 내며 가득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