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다면, 주제는 재발이겠지?
우스개처럼 그런 소릴 했었다.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진 않았다. 그리고 올해 4월, 병원에 입원하여 링거줄을 꽂은 채로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제 후속작을 쓸 때가 되었군. 섬유근육통은 다 나아버렸습니다. 전 꿈을 찾아서 대학에 편입했습니다. 좋은 보육교사가 될 것입니다. 또 아파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었던 지난 매거진에 이어질 후속작 말이다.
내가 속세에 젖어 사는 동안 브런치북 연재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생겨서, 이번엔 연재로 글을 쓸 예정이다.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질 때를 대비해 미리 몇 편 써두었다. 에세이를 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건 걱정되지 않는다.
다만 걱정되는 건 오직 하나. 이 에세이 전체가 나의 치부라는 사실이다.
브런치북 계획 단계에서 목차를 구상했다. 여기저기 자잘하게 아픈 얘기를 20편은 너끈하게 할 수 있을 듯했다. 그 장구한 목차 속에서 나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일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신체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정신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나는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구태여 그런 점을 알리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초라하다.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 전공지식과 이력서에 쓰일 리 만무한 짧은 알바 경험 몇 건. 연락처에 남은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친족 관계 포함). 그러니까 뭐가 자랑이라고 이런 이야기를 쓰냐는 소리다.
15분 정도 앉아있었더니 허벅지가 쑤신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아래 책을 읽고서였다. 아서 플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 저자는 39세에 심장마비를 겪고 이후 고환암을 진단받았다.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기며 저자는 자신의 질병 경험을 에세이로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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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말한다. 질병 안에는 새롭게 될 기회가 담겨 있다고. 질병이 제공하는 이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질병에 관해 생각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질병을 주제로 써야 한다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개인이자 사회로서 질병을 받아들이고,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새롭게 될 기회를 잡으려 한다.
이 글이 아무런 쓸모가 없더라도 좋다. 오히려 내 흠결이 되어도 좋다. 내가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릴 수 없어도 좋다. 쓰고 난 끝에 내가 나의 비실비실한 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정말로 그렇게 될까?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하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이번 연재에선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울었으면. 눈물이 많은 엄마를 위해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