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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새의숲 Nov 26. 2023

프롤로그  

- 이대로는 못 살겠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어느 날 나는 여자라면 한 번쯤 일하고 싶어 한다는 멋진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통창 유리 건물에, 한국의 중심이라는 역삼역. Beauty 업계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여자라면 모두 들어 알만한 그런 회사에 화려함을 가득 담은 채 다니고 있었던 시절. 역설적으로 내 삶은 곪아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화려한 것들은 내 삶에 하나도 필요하지 않은 쓸데없는, 과녁을 벗어나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들이었다. 희미하게 자각은 있었지만, 나는 회사 생활은 다 그런 것이며 만족할만한 삶이라는 건 없다는 자기만족과 위로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어느 날, 한강을 건너던 지하철 안에서 나도 모르는 눈물이 쏟아져 당황하기 전까지는. 


그날, 시원하게 뻥 뚫린 한강뷰를 보며 지나가는 지하철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더 당황스러웠던 사실은 하나도 슬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요즘 내 생활에 그다지 슬플 이유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북받쳐 눈물을 펑펑 쏟을 이유는 더더욱. 


며칠 째, 그 증상이 계속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주변에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약만 주는 곳 말고, 상담을 하는 곳으로. 어쩌면 나는 내 눈물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과 내가 심각하게 단절된 것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찾아간 곳에서 선생님께 증상을 이야기했다.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나요. 


물론, 그럴리는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고. 

그날 이후,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한 것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고구마 줄기처럼, 끝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연결되고 이어져 캐도 캐도 계속 뿌리를 가늠할 수 없이 튀어나와 포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가족 문제부터, 내 남자친구 문제부터, 내 과거 생활부터, 현재 회사 생활까지, 하나도 내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철저히 나를 속이고 있었다.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만족한다고.


내가 꾹꾹 눌러 담아둔 판도라 상자는 서서히 뚜껑이 열리고 있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다시 닫으려 애써도 이미 부피가 커져버려 다시 상자 안에 넣어버릴 수도 없었다. 열린 판도라 상자를 열어놓고 의사 선생님과 나는 참으로 서로 당황스럽게 서로를 바라봤고, 가장 당황한 건 나 자신이었다. 


내가 정말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그것을 어떻게 무시해 왔었는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그토록 무시할 수 있는지, 

혹시 내 인격이 두 개가 아니라면 이게 가능한 일인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 


정말 삶이 오늘로써 끝난다 해도, 이렇게는 더 이상 삶을 유지하지 못하겠다.라는 절박함이 나를 감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삶의 벼랑 끝에서 '변화'를 찾는다. 지금 삶이 그럭저럭 살만하다면 그다지 변화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속하지 못할 삶이라면 변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삶을 죽여야만 가능하다. 즉, 현재의 내가 한 번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나와 내가 철저하게 이별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변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정도의 큰 혁신 같은 사건이 일어나야 함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유럽 문화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로마, 그리스, 터키 등에 있는 고대 유적들과 그리스 로마신화, 그리고 로마 역사와 서양화에 심취했다. 

미술에 관심 없던 내가, 색채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찾아보고, 특히 <상징>에 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림들을 해석하는데 관심을 느꼈다. 


책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읽으면서, 고대 사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느꼈고, 그 오래된 물건 유적들과 아직도 함께 머무르는 그들의 세계, 도시를 경험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점점 여행에 대한 갈망은 커졌고 , 어느 날 퇴사를 결심했다. 


이대로 살다 간, 난 내일 죽을지도 몰라. 죽기 전에 유럽 여행이나 실컷 하고 죽자. 


그렇게, 퇴사 날짜를 정했다. 

그래서, 생애 첫 여행을 그렇게 유럽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유럽으로의 오픈티켓을 끊었다. 돌아오는 날짜는 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산티아고 드 깜포스텔라, 순례자의 길은 가보기로 했다. 


그 외에는 이스탄불로 들어간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 그저 배낭 하나 짊어지고 떠나기로 난생처음 '나 스스로 ' 결정했다. 내 주변 딱 한 사람 외에는 모두가 반대하던 그 여행을, 어차피 죽을 거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죽을 거란 각오로 떠나기로 했다. 


난생처음, 예측되지 않는 세계로 발을 디뎠다. 


서른 살 나에게, 첫 해외여행이자 혼자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세계여행기

#유럽여행기

#자유여행기

#퇴사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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