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보겠다고 찾아와준 사람

二.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by 간장밥

내 리즈 시절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였다. 남들은 운동을 해서 몸을 가꾸고, 자기한테 잘 맞는 화장법이나 패션을 익숙하게 한 다음, 그러니까 20대 중후반 쯤에야 전성기가 온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지나치게 빨랐다.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이거 참,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스럽지만, 꽤 귀엽고 똑띠나게 생겼었다. 남자고 여자고, 안 친한 아이들이 없었고, 나는 늘 쾌활했다. 인싸였다.


그러다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 몸에 살집이 붙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과체중 상태가 이어졌다. 눈이 나빠져 안경도 쓰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얼굴에도 살들이 들어차며 눈코입이 묻혀갔는데, 안경을 쓰니 눈은 더 작아졌다.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돋던 어린이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몸도 마음도 움추러들었다. 전과는 달리, 친구들 앞에 나서지를 못했다.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학교에서 따돌림까지 당하고 만다. 누구보다 재밌게 같이 놀던 친구들이 따돌림을 주도하기도 했다. 슬픈 기억이다.)



우리 때는 생일파티를 집에서 했다. 가족들끼리 오붓하게 밥먹는 거 말고, 친구놈들 와글와글 부르는 것도 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쯤에는 롯데리아니 파파이스니 패스트푸드점에서 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생파는 으레 집에서 열렸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할머니 덕에 우리는 시장 상인 대부분을 알고 지냈고, 생일 때는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먹거리 얘기다.


할머니 생선가게 건너편 떡볶이집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이따만큼 산다. 많이 샀으니까, 식혜는 서비스. 시장 초입 과일가게에서는 애들 입에 물릴만한 과일을 사고, 건어물집에서는 미역을, 정육점에서는 돼지고기를 산다. 미리 주문한 생일떡을 떡집에서 들고오고, 슈퍼에선 탄산음료를 가져온다. 미역국에 넣을 조개는 할머니 역할이다.


엄마는 진작부터 생일상을 준비하셨다.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하고. 종이컵에 떡볶이를 나눠담아 밖에서 먹는 컵볶이 느낌을 낸다. 사지 않고 직접 만 김밥은, 우리집 생일파티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리즈시절이 빨랐던 것처럼, 사춘기도 꽤 이르게 왔었다. 심장이 쿵쿵거려서 여자애들 얼굴을 제대로 못 쳐다보게 된 게 4학년 말 즈음 이었으니까,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사춘기는 그보다 더 이를거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어렸을 적이지만, 해마 속 깊숙히 잔상이 남은 여자 사람들이 몇 있다. 같이 연지곤지 재롱잔치를 했던 짝꿍, 각자 옥상과 베란다에서 원거리 수다를 떨었던 옆집 누나, 크고 까만 눈과 그보다도 더 까만 머리카락이 예뻤던 우리반 지수.


지수는 유달리 부끄러움이 많았다. 반에서 다섯손가락에 들만큼 키도 작고 소극적이었다. 그런 지수가, 나는 유독 눈에 밟혔다. 친구들끼리는 다같이 잘 놀아야한다는 슬기로운 생활 바른 생활 같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겉도는 친구들의 손을 더 열심히 잡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남자편 여자편을 가르지말고, 다 같이 놀자고 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지수에게 같이 놀자며 계속 말을 걸었고, 결국 학년말에는 지수와 꽤나 가까워졌던 것 같다.


그러다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며, 지수는 전학을 갔다. 먼 동네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어느 동네로 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혼자서는 시내버스도 못 타던 꼬맹이들에게는 옆 동네든 옆옆 동네든 똑같았다. 심지어 이사나 이민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스마트폰은 커녕 핸드폰도 없는, SNS는 커녕 이메일도 없던 시절. 이사는 곧 이별이었고, 전학은 영원한 작별이었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했다. 작별이어야 했다.



그 해 생일도 우리집에서 열렸다. 3~4학년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자신감은 진작 쪼그라들었고, 인기도 세 풀은 꺾인 때였지만, 파티에 온 애들은 은근 많았다. 그 때는 요즘만큼 학원 학원 하지 않았으니까, 같은 반 친구 생일파티는 잘 안 빠졌기 때문이었을 거다. 애들은 떡볶이가 든 종이컵을 들고 다니며 뛰놀았고, 자식을 데리고 같이 온 누구네 엄마들은 안방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은, 음식 냄새와 시끌벅적한 소리들로 마저 채워졌다.


그러나 손님이 다 온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남은 공간이 없다고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지수다!”


아, 감탄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그 장면! 그 때의 모습이 너무나도 또렷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낮은 빌라 3층. 계단마저 투박했다. 그 높은 돌계단을, 지수는 한 칸씩 영차 영차 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작은 키에 팔을 한껏 뻗어 엄마손을 붙잡은 채 말이다. 계단 옆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마치 주연배우에게 핀라이트를 쏘아대듯 일부러 지수만을 곧게 비췄고, 생일날 백설기보다 하얗던 옷은 그 짙었던 검은 머리와 대비되어 더욱 밝았다.


“지수가 장밥이 생일파티에 가고 싶다고 어찌나 조르던지”


지수네 엄마가 웃으며 얘기했다. 지수가 전학을 간 다다음 해였다.



지수는 예뻤고, 지수가 예쁜만큼 나는 창피했다. 어쩔 줄을 모르겠었다. 아직 자각조차 하지 못한 사춘기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당시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탓이 더 컸던 것 같다. 살도 찌고, 안경도 끼고, 눈은 더 작아지고, 더 이상 인싸도 아니고. 생일이니까, 우리집이고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평소보다 친구들 앞에서 더 큰 소리를 낼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는 알잖는가,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걸.


그래서 도망쳤다. 지수를 버려두고, 남자놈들 몇몇과 팽이를 치러 나갔다. 집 앞 골목, 시멘트 바닥 위에서, 팽이는 내가 치는만큼 돌았지만, 내 마음은 내가 치지 않았는데도 절로 울렁거렸다. 싱숭생숭,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에서 나서기 전에 슬쩍 본 거지만, 지수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 때랑은 반도 달라졌고, 새로 전학을 온 애들도 많았으니까. 원래 지수는 그다지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말이다. 지수는 엄마품에 자꾸 기대려고 했고, 그러면서 그 큰 눈동자는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 예전처럼, 얼른 말을 걸어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난 더 부끄러웠고, 그래서 얼른 도망쳤다. 눈맞춤도 잘 못하고, 멀리서 친구가 왔으니 같이 놀라는 엄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골목으로 나갔다. 이성 간의 간지러운 감정을 알기엔, 나는 많이 어렸다.



그 날은 정말 마지막이 되었다. 그 뒤로 지수를 본 적은 없었다.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마땅찮은 때였지만,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토록 부끄러움이 많고 자신감도 없었던 내가 무언가를 더 잘했을리는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다행히 축복받은 것은, 그 날의 장면 몇 장이 스냅샷처럼 기억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또래치고도 꽤나 자그마했던 체구. 그 작은 발로 한 칸 한 칸 계단을 오르던 모습. 강산이 두세번은 바꼈을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굳히지 않아 뽀얗게 끓어오르는 순두부처럼 무언가 몽글몽글 올라온다. 그 때, 그 친구를 챙겼더라면 어땠을까. 손이라도 잡고, 같이 골목을 나섰으면 어땠을까.


설렘과 아쉬움. 이것이 내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다.


너무 좋잖아,
나 하나 보겠다고 저 멀리서 와줬는데!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學而>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학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