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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Jun 14. 2020

돈이 없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내가 일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바로 통장이다. 사실 일하기 전까진 종이통장을 제대로 만져본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현금을 대신해 체크, 신용카드를 많이 쓰고 스마트 폰 덕분에 ATM기기도 잘 이용하지 않는 게 요즘 사회 현상이다. 모든 것이 간편화 되었다. 심지어 카카오뱅크는 은행 지점도 없다. 모든 것이 비대면화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종이통장이라니, 이것은 가히 고대 유물과 가깝다고 느껴졌다. 누가 요즘 그런 구시대적인 유물을 쓰나 했는데 은행에 오시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다들 손에 종이 통장 하나씩을 들고 오셨다. 통장에는 날짜와 돈이 들어오고 빠져나간 내역 그리고 잔액이 표시되어 있다. 


보통 어르신들은 종이통장을 이용하신다. 아직 카드를 쓰는 게 서툴기 때문에 꼭 현금을 쓰신다. 그리고 기계를 다루기도 어려워하셔 돈을 찾기 위해선 꼭 나를 부르신다. 종이통장을 내밀며 “총각 30만 원만 찾아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통장엔 “잔액이 부족합니다.”라고 뜬다. 그래서 통장을 보니 잔고가 0원이었다. 정말 딱 0원이었다. 그래서 어르신께 말씀드렸다. 


“어르신 돈이 부족해서 안 나와요.”

“그럼 있는 대로 찾아줘.”

“돈이 아예 없어요....”

“그려... 할 수 없구먼 미안해 총각.”


처음엔 돈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게 힘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돈이 없다는 말이 조금 낯부끄럽고 내가 훔쳐 간 것도 아니고 내가 뺏은 것도 아닌데 그냥 미안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색했고, 괜히 민망해서 “돈이 없다. “는 말을 조금 더 순화해서 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딱히 떠오르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물끄러미 종이통장만 만지작 그렸다. 


돈이 없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의 통장 잔고를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건 어쩌면 부끄러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 돈이 전부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음은 가난하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곧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능력이 없으면 나 자신이 초라해지고 초라해진 난 더 이상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게 됨으로 스스로 작아지고 존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존감이 떨어지게 된다. 돈이 없음은 나의 자존을 떨어뜨리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이가 많건 나이가 적건 나이를 떠나서 남자건 여자건 성별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일하는 동네는 잘 사는 동네가 아니다. 그래서 기초생활 수급자 분들 그리고 노인 분들이 많이 사신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음을 자주 느낀다. 늘 통장에 10만 원 단위 정도만 차 있고 100만 원 단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기 힘든 분도 계시고, 아예 아무런 경제활동 없이 정부에서 주는 수급자 비용과 노령연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분들도 많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다 보니 그분들의 통장은 늘 얇다.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친절히 그리고 안전하게 돈을 뽑아서 드리는 것 밖에 없다. 사실 그들의 통장 잔고와 나의 통장 잔고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하루 종일 남의 통장잔고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 통장잔고도 좀 신경을 써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터무니없이 많은 통장잔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보통 많아 봐야 1,000만 원 자리 선에서 잔고가 끝나는데 간혹 억 단위까지 자릿수가 채워져 있는 손님을 보면 이 분은 어떻게 해서 이런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은행만큼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드러나는 곳은 또 없다. 돈이 많으면 그만큼의 서비스를 받는다. 흔히 갑부인 분들은 은행에서도 엄청 대우를 해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딜 가나 그렇다. 백화점에도 돈을 많이 쓰는 고객은 vip실로 따로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은행도 vip고객은 혜택이 주어지고 따로 방도 있어서 거기서 팀장님이 직접 상담을 하시거나 지점장님 또는 부지점장님이 따로 나오셔서 안내를 하신다. 그런 걸 보면 ‘아 돈이 많으면 정말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돈이 없는 분들은 그냥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특권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전부이기 때문에 돈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런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민낯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은행이란 곳이다. 이곳에선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나누고 대우하는 곳 중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나의 위치는 돈 많은 갑부들이 아닌 기초생활수급자 또는 노령연금을 받으며 삶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분들의 위치와 사실 그리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난 어르신들이 나를 찾으면 기꺼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뛰쳐나간다. 누군가가 나를 찾고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나를 더욱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비록 간단한 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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