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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Sep 08. 2020

은행은 새해가 되면 '달력 전쟁'을 준비한다.

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은행이 가장 바쁜 날은 바로 연초와 두 번의 명절을 낀 일주일이다. 명절이 힘든 이유는 대충 알겠는데 연초가 힘든 이유가 뭐지?라고 궁금해 할 수도 있다.(물론 연말도 힘들다) 은행의 특수한 기능? 때문에 연초에도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그것은 바로 ‘달력’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은 특이한 속설을 믿는다. 바로 “은행 달력을 집에 걸어두면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말이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지 무슨 달력 하나 걸어둔다고 돈이 들어온다는 걸 믿다니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미신 같은 걸 믿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은 거 같다. 그럼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은행에 와서 달력을 찾는 걸까. 그건 그냥 예전부터 은행에서 달력을 줬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래되면 당연히 '은행=달력 주는 곳' 이 된다. 이유는 없다. 매년 그래 왔기 때문이다.     


연말이 되면 각 영업점 은행들은 ‘달력 전쟁’에 돌입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올해는 달력을 얼마나 주문할 것이며, 달력을 나눠 주는 기준은 어떻게 정할 것인지 회의까지 한다. 그리고 달력도 종류가 다양하다. 탁상 달력, 벽걸이형 달력, 대형 달력 등 종류별로 얼마나 주문을 할 건지도 따져야 한다. 그렇게 수량이 맞춰지면 달력이 배달된다. 지점의 고객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달력의 양은 많아진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도 달력을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 은행 달력은 인기가 많다. 그렇게 달력을 배송받은 은행 직원들은 퇴근도 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비닐에 달력을 넣는 수작업을 한다. 은행원도 고상한 직업 같지만 생각보다 몸을 쓰는 노동도 한다. 물론 강도는 약하지만 말이다.     


이 수작업은 생각보다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비닐이 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 비닐이 찢어질 수가 있고, 달력도 종이이다 보니 거칠게 다루면 금세 찢어진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살살 다뤄야만 한다. 그리고 종이 재질이 두껍지만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손가락을 베일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달력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걱정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까. 수량이 작으면 어떡하나 등등 매년 겪으면서도 매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아직 해가 바뀌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벌써부터 은행을 찾아와 달력을 달라고 한다. 이미 시작된 것이다. 달력 전쟁!! 부지점장님 지시로 지점 문 앞에 달력을 배부하는 날짜와 꼭 1인 1부만 지급한다는 것을 강조해 둔다. 물론 이것은 전혀 지켜지지 않을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해가 바뀌고 모두 새 마음 새 뜻으로 달력을 배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손님들은 지점에 오자마자 나에게 말한다.     


“총각 내 달력 맡아놨지? 어딨어? 빨리 줘 오늘부터 준다 했잖아.”

“네 고객님 일단 번호표 뽑으시고 기다리셨다가 신분증이나 통장을 은행 직원분에게 보여주면 드리게 돼있어요.”

“아니 뭘 기다려 또 나 몰라? 아 그냥 줘 나 바빠.”

“알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해서요. 제가 그냥 임의로 막 드릴 수가 없어요.”     


이 정도까지 말하면 대충 알아듣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버럭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통장이나 신분증을 확인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 두 번 가져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어제 받아갔으면서 오늘 또 와서 받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 정도로 ‘달력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해가 바뀌고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도 계속된다.      


이것은 극히 일부, 이것보다 약 3배는 많은 양이 더 있다는 걸 알게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력을 찾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가장 힘든 고객은 바로 이런 부류다.     


“삼촌 나 카렌다(달력) 하나만 더 주면 안 돼? 아니 우리 남편 꺼도 가져다주게. 우리 남편 알지 그 머리 이 만큼 까진 아저씨 우리 남편도 여기 지점 거래 해~ 그러니까 내가 남편 대신 받아주려고 하나만 더 줘.”

“죄송합니다. 고객님. 원칙상 본인이 직접 오셔야 해요.”

“아니 그냥 몰래 하나만 주면 안 돼? 응?”

“안돼요. 만약 그러다 다른 손님들이 보시면 왜 저 사람은 두 개 주고 나는 한 개 주냐고 하면 제가 엄청 곤란해져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결국은 팀장님께 가서 똑같이 말하고 하나 더 받아간다. 그리곤 나가면서 나를 한 번 쓱 쳐다보고 나간다. 마치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어~ 하면 다 돼~’ 하는 눈빛으로 말이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기어코 손에 넣고 말겠다는 저 의지는 정말 본받아야 하지만 그놈의 달력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지 진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집에 달력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남편이랑 각방을 쓰나? 아니면 남편이랑 별거를 하나? 아니 집에 도대체 달력을 몇 개나 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손님은 이미 다른 은행에서 달력을 몇 개나 들고 있다. 그런데도 더 얻고 싶어 우리 지점까지 와서 결국 또 얻어간다.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은행 달력이 인기 있어서 인터넷으로 도로 판다는 뉴스 말이다. 아마도 그(녀)들이 달력을 모으는 이유가 혹시 부업으로 되팔기 위해서 인 걸까? 꽤나 짭짤한가? 그럼 나도 한 번 해봐? 이젠 하다 하다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웃기고 어이없는 것은 누구도 달력 달라고 하지 않고, 꼭 카렌다를 달라고 한다. 카렌다가 뭐지 하고 잠시 생각했다가 카렌다가 calendar라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사실 달력을 나눠주는 기준은 은행으로 봤을 땐 따로 없다. 영업점에서 그 기준을 둔다. 은행이 달력을 나눠주는 건 일종의 영업전략이다. 특히나 VIP 고객들은 먼저 명단을 짜 놓고 그들에게 줄 것은 이미 따로 마련이 돼있다. 그들에게는 1인당 1부를 나눠준다는 은행의 방침도 철저히 무시된다. 이미 종이가방에 한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역시 돈이 많으면 달력도 많이 받을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달력도 1인당 1부씩 밖에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늦게 오면은 수량이 다 떨어져 받지 못하는 사람도 생긴다. 그럴 때면 왜 자기는 안 주냐고 화를 내시는 분도 있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늦게 온 본인 탓이지만 수량을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한 은행 잘못도 있기 때문에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1인당 1부씩 드리는 건데 꼭 2개 가져가는 사람들이 문제다. 근데 그 욕을 왜 나한테 하는 걸까. 난 일개 은행 경비원일 뿐이데 말이다.     


‘달력 전쟁’은 끝이 없다. 해가 바뀌고 벌써 3월이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가끔씩 찾아와 달력 있냐고 묻는다. 그쯤 되면 달력에 달 자만 들어도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카렌다에 카자도 진절머리 난다.) 이런 사태를 겪으며 든 생각은 과연 우리 엄마도 은행에 가서 카렌다를 달라고 할까? 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해서 물었더니 엄마는 주면 받고 안 주면 그냥 온다고 했다. 역시 우리 엄마다.      


매년 은행 달력을 얻으러 오시는 분들은 아직 부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얻으러 오시는 걸까? 그렇다면 얼른 부자가 되셨으면 좋겠다. 그럼 달력을 받으러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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