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하남 May 11. 2022

그 인간은 결국 날 죽이고 말 거야

아내 폭력, 깨친 유리창이 만드는 참혹한 결말

깨친 유리창의 법칙

범죄 심리학에서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이론이 있다.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를 방치하면 버려진 차로 인식되어 차량의 부품을 훔치거나 더 파괴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에서 착안한 것으로, 깨진 유리창과 같은 관리 소홀이 도시 전체의 범죄율 상승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나는 각종 아내 폭력이 결국 극단적 상황의 발생으로 이어지고 마는 것이 이 법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들은 갈등, 혹은 아내의 행동이 원인이라고 믿는 문제가 발생하자마자 곧바로 아내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건 아니다. 처음은 아마 폭언 정도로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 점차 물건을 던지고, 손찌검이 시작된다. 그래도 아내가 원하는 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아니 순종하더라도 이미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습관화되면서 그냥 기분이 나빠지면 만만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견제받지 않는 폭력이 반복되면서 자신의 잔혹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절제력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결국 아내를 살해하고 마는 것이다.


아내 폭력은 왜 이렇게 극단적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밝혀지지 않고 비극을 초래하고 마는 걸까. 이는 여성이 자신이 당하는 피해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아내 폭력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 하나, 피해 인식의 부재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 중 하나는 연예인 부부들의 일상생활 및 그에 따른 부부 싸움이다. 비공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문제들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문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성기가 지난 상황에서 방송에 나올 수 있는 수단, 혹은 가진 명성이나 인지도에 비해 더 높은 주목을 받기 좋은 수단으로 사생활을 파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을 소개하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쭉 살펴보면 이것이 대화와 서로 간의 양보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서로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갈등이 맞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아무리 봐도 아내에 대한 강간이거나, 강압적 통제이거나, 정서적 혹은 경제적 방임 등 가정 폭력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인데 출연한 당사자와 패널들은 그것을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이 가하는 행동이, 자신이 당하는 행동이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아무런 논란이 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대중에게 송출된다는 것은, 많은 부부들 이러한 착각을 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갈등이라고 여기는 폭력의 원인은 남성의 통제 욕구이다. 직접적 갈등 사유가 성적인 부분이든 경제적 부분이든 다른 부분이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순종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이는 결혼 전에 이루어지는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이별 통보에 대한 물리적 보복이 발생하는 원인과 같다.


단지 결혼이라는 제도적 결합을 통해 그 관계가 끝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내는 자신이 당하는 행위가 범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폭력과 통제를 자신에 대한 사랑 혹은 관심으로 착각한다. 가해자 남편조차 그런 착각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이유 둘,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과 경제적 자립 문제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폭력을 당하는 상황임을 명확히 인지를 하더라도, 많은 아내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저항하거나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못한다. 아내들이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지 못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러한 처지에 처했다는 것을 주변에 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상황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사회 수준에서 주변 사람들은 과연 어떤 행동 양상을 보일까.


나는 진심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는 매 맞고 사는 아내라는 새로운 뉴스에 흥미를 보이며 속사정을 궁금해하고 가십으로 소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괜히 엮일까 봐 불안해하며 자식들에게 저 집 애 하고 어울리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순간 아내는 더 이상 직장 및 주거지에서 이전과 같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며 그 여파는 자녀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이혼까지 이어졌을 때 이혼녀와 이혼가정 아이라는 낙인을 감당하기는 더욱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는 생명의 위협을 크게 느끼는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그냥 참고 살며,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부부 관계는 더욱 파탄에 이르고 남편이 저지르는 폭력의 잔혹성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심각해지고 만다.


막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단계까지 와도 아내들은 또 좀처럼 신고 및 이혼을 결정하지 못한다. 남편과 갈라선 이후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남편에게 법적으로 경제적 부양 의무가 있어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육아 및 가사노동 과정에서 경력이 단절되고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생각할 때 자식들을 데리고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폭력적인 전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도 없다. 또 그냥 참게 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는 달래고 또 달래며 술상을 내거나, 스킨십이라도 유도하며 남편의 분노를 잠재우고 하루하루의 위기를 넘기며 살아간다.


이유 셋, 가해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

이 모든 고민을 극복해도,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는 원초적 공포는 아내의 홀로서기 결정을 가로막는다. 우리는 헤어진 전 여자 친구, 혹은 이혼한 아내를 찾아가 강간하거나 살해했다는 뉴스를 너무 자주 접한다. 비슷한 사유로 먼저 이혼한 주변 사람의 소식이나 소문을 들어도 현재의 보호 제도와 시민의식이 내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얻기 어렵다. 그냥 참고 견디면 남편은 때로는 날 위협하겠지만 어찌 됐건 날 필요로 하니 생명은 남겨것이다. 하지만 이혼 후 잃을 게 없어지면 저 인간은 정말 날 죽이려고 문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죽음의 공포는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의 폭력을 인내하게 만든다.


싹부터 자르는 사회적 합의를

어둠 속 영웅 배트맨이 활동하는 도시 고담의 실제 모델은 뉴욕이다. 뉴욕은 원래 높은 범죄율로 악명이 높았다. 1994년 뉴욕시장으로 선출된 루돌프 줄리아니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적용하여 경범죄부터 강력하게 단속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낙서나 지우며 행정력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들었지만, 점차 범죄율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뉴욕은 미국을 상징하는 도시로 재탄생했다.


아내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아내들이 죽고 나서야 남편들을 처벌하는 방식으로는 아내 폭력의 반복을 끝낼 수 없다. 아내 폭력은 처벌 수위를 고려하며 치밀하게 계획되는 범죄가 아니라, 아내에 대한 존중과 내면의 도덕성을 상실해가며 저지르게 되는 학대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초기 폭력부터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여성들은 아내 폭력을 당할 경우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지할 수 있고, 남편들은 자신이 사랑 또는 가르침이라고 포장하는 행위가 범죄에 불과함을 자각하고 아내는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속적으로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교육하고, 대중들이 접하는 콘텐츠에도 접목시켜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공론화하는 과정을 거치면 좋을 것이다.


주변 여성이 폭언이나 손찌검, 행동 통제 등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거나 인지하게 되면, 가정 내의 문제라고 해서 개입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경찰에 신고 정도는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가정에서 발생한 불행을 가십으로 소비하지 않으며, 피해자들을 멀리하지 않고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대해야 한다. 이혼 가정에 대한 호기심과 섣부른 추측, 편견과 고정관념은 억누르고 그냥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타인을 대할 때 소위 '정상가족'을 전제하고 대화를 트는 관습을 바꿔야 하며,  함부로 남의 호구조사를 하거나 남의 가정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줄 알아야 한다.


아내들이 실질적으로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도 제대로 형성되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는 여성들의 경력 단절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제적 자립이 가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제대로 된 육아휴직 보장, 직업 재교육, 전반적인 저임금 일자리의 임금 수준 향상, 기타 복지 향상 등이 이루어져 홀로서기 후의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 부양 의무가 있는 전남편들이 제대로 이를 이행하도록 법적 강제도 더욱 실효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의무 불이행 시 국가기관의 확인을 통해 해당 사실을 직장에 통보하거나 의료보험 및 기타 보편복지 혜택 제외, 금융거래 제한 등의 조치도 고려할 수 있다.


이혼 후 가해자들로부터 확실히 물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법안도 마련되어야 한다. 당장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거리 유지 의무를 일정 횟수 이상 위반 시 위치 추적을 통해 경찰의 현장 출동 및 체포까지 가능하게 하거나, 위의 내용처럼 해당 내용을 직장에 통보하여 사회적 평판을 의식하게 하는 방식 정도이다. 이는 비전문가 입장에서 떠오른 단편적 망상에 불과하고, 전문가들의 연구와 사회적 합의 과정을 통해 더 나은 방안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가장 위험해지는 비극은 이제 끝나야 한다. 그 책임은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도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