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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Feb 25. 2023

한 줄

그날의 쓸모를 생각하다.

또 말라비틀어진 한 줄이다.     


눈썹을 치켜들고 히익 집중해서 쳐다봐도 붉은 선이 보여야 할 자리는 말끔하게 텅 비어있다.

4일 전부터 오늘은, 오늘은 희미하게라도 두 줄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단호박 한 줄에 명백한 실패를 깨끗하게 인정했다. 휙 쓰레기통에 임신 테스트기를 때려 넣고 뚜껑을 탁 닫았다.


며칠 후 쐐기를 박는 붉은 손님이 찾아왔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억울한 마음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왜 매달 꼬박꼬박 생리를 해왔던 거야?



생리 하루 이틀 전이면 가족, 남친, 혹은 직장에서 누군가와 한판 푸닥거리를 하곤 했다. 생리가 시작되면 그제야 이래서 그랬구나, 하. 나란 존재는 이토록 자율성 없이 호르몬의 영향에 휘둘리는 무력한 존재였던가 느끼며 뒷수습을 했다. 그뿐인가, 첫째 날 둘째 날 배를 쑤셔대는 생리통 때문에 진통제를 먹고 끙끙대며 직장 휴게실과 집에서 앓아 누어야 했던 날들이 도대체 며칠이었으며 혹여나 중요한 일이 있다 하면 생리일 먼저 체크했다. 수학여행, 수능일을 앞두고 친구들과 생리 날짜를 계산하며 안도의 한숨을, 혹은 피임약을 먹어서 생리를 늦추게 하는 방법을 찾고 그날과 겹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랐다. 한편 생리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또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몸에 문제가 생겼는지 신경이 쓰였다.     


아이도 못 가질 거면 그동안 생리를 왜 한 거니. 무슨 쓸모가 있었던 거야? 막상 그날이 처음 나에게 찾아왔을 때의 당혹감, 그렇게 스타트를 끊어서 지금까지 장장 25년간 한 달에 한번, 일주일씩이나 난 왜 이 고생을 한 거야. 숫하게 겪어낸 그날들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했던 생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해졌다.      


아이가 꼭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거,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아이가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편과 이대로 둘이 사는 삶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40살이 넘어서야 늦게 임신을 준비하게 된 건 지금 시기를 놓치면 영영 아이를 갖기가 어렵겠다, 내 인생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최후의 시기이구나 한번 노력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임신을 준비하는 사람도 별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임신을 원하는 사람도 원치 않게 임신을 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 임신을 가장 큰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염원하며 사는 건 아니다. 임신에 대해 마음을 쏟는 비중이 다를 수 있는 거니깐. 내 경우는 평생 아이 없이 살게 되더라도 그때 노력해 볼 걸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임신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 없이 사는 걸 후회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여생을 쭉 둘이서만 사는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생겼을 때 삶이 훨씬 더 풍요롭고 행복할지 확신도 없었다. 이도 저도 확신이 없던 거다. 가보지 않으면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품고 갈팡질팡.  몇 년을 망설이다가 결국, 시험 전날 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을 맞이해서 부리나케 벼락치기 공부를 하듯 가임 나이 데드라인이 되어서야 벼락치기 임신 준비를 하고 있다.       


결혼 초부터 바로 임신을 준비했으면 성공했을까? 하고 싶었던 일들, 해야 했던 일들, 아버지 간병 등으로 그때는 참 바빴다. 무엇보다 나와 동갑인 82년생 김지영의 대사 하나하나는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아이를 낳자는 남편 앞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것 같아 망설이는 지영 씨의 모습은 나와 똑같았다. 아이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삶을 감당할 준비가 덜 되어있음을 알았기에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갖자고 말하는 남편과
망설이는 지영 씨  (82년생 김지영)

나보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큰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었다. 친구들 카카오톡 대문사진이 아이사진으로 도배되어 가도 별로 부럽진 않았다. 임신을 망설였던 건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쉽게 건너지 않는 내 성향 탓도 있지만, 늦은 결혼으로 현실 육아의 어려움을 다 알아버려서도 있을 것이다. 어른들의 아이를 꼭 가져야 한다는 말은 그냥 관습적인 말로 들렸다.



일찍 임신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진 않다. 아이보다 내 인생이 더 중요했고 눈앞에 닥쳐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아마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임신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도 아니면 모 라는 양자택일로 보는 게 아니라 한쪽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도 개나 걸 쯤이라도  임신과 내 인생에 중요한 일들을 병행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비록 기능도 체력도 떨어져 가는 노쇠한 몸뚱이를 소유하게 되었지만 사람과 인생, 행복에 대해 조금은 더 깨우친 지금이 아이에겐 더 좋은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임테기 한 줄을 줄곧 보아오며 우리 부부는 말로만 듣던 난임 부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그렸던 아이 없이 둘이서 사는 삶이 진짜 내 삶이 될 수 있겠다는 걸 느끼고 있다.      




내 몸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내 곁에 나란히 서게 되었음을 나타나는 두 줄. 두 줄을 보게 되면 참 기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끝까지 한 줄이라도, 나머지 한 줄이 결여되었다고 여기지 않고 나는 본래 한 줄이었으니 이 모습이었으니, 원래대로, 있는 대로 여전히 잘 살아갈 수 있다 다독이며 이 또한 잘 받아들이고 싶다.          






*이미지출처

- 생리  : https://www.k-health.com/news/articleView.html?idxno=48782

- 82년생 김지영 영화 캡처

- 임테기 : http://m.dongascience.com/news.php?idx=28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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