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두앵두 Nov 29. 2019

꽃보다 니 둘 #2 연년생 육아의 고단함

#5  연년생 육아의 고단함

꽃보다 예쁜 두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워낸 지금, 난 두 아이들이 연년생인 것에 몹시도 만족하며 산다. 연년생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장점이 많다. 차이 많이 나는 두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는 게 훨씬 수월하기도 하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다. 큰아이 민혁이가 5살이 되기 전까지의 시기는 말 그대로 헬 육아를 경험했다.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는 일의 고단함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둘째 임신을 확인한 건 큰아이 민혁이의 백일 즈음이었다. 말 그대로 멘붕이 왔다. 아기 돌보는 일이 처음이라 모든 일이 서툴고 실수투성이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민혁인 잠이 별로 없는 아기였다. 무수히 많은 날을 날밤을 꼴딱 세는 아기. 아빠가 출근 준비하는 시간인 6시에야 겨우 잠이 들곤 했다.

그것도 내리 푹 자는 게 아니라 겨우 두세 시 간 남짓 잠들었다가 "으앙!" 울면서 잠이 깨곤 했다.

당시의 남편과 내 얼굴엔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앉았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남편이나 나나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무지 둘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어머! 어떡하니!"로 시작되는 주위 모든 사람들의 반응에 자신감은 점점 더 떨어지기만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전화를 걸어 친정아빠에게도 임신소식을 알렸다.  

"둘을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 수술을 해야 하지 않겠니."

"아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 너무한 거 아니야?"

순간 욱해서 성질을 내고 전화를 냅다 끊어버렸다. 손주보다는 딸이 겪을 고생이 먼저 보여 나온 말이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내 마음을 들킨듯해 더 성을 낸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딸아이한테는 너무 미안하지만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이 그 통화 이후 하나로 합해졌다.

내 아이 내가 지킨다!

우리 부부는 둘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입덧은 원래 하지 않는 체질이라 임신 초기의 고생은 없었는데, 임신 7개월쯤부터가 고난의 시작이었다.  몸이 무거워지는 임신 후반기부터는 내 한 몸 움직이기도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큰아이 8월생, 둘째 아이 예정일도 8월. 날이 차츰 더워져서 내 몸의 열기를 견뎌내기가 힘든 데다가 큰아이 민혁이는 서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모든 서랍을 다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넘어져서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늘 아기를 따라다니면서 정리하고,  청소하고, 분리수거하고, 저녁 준비하고, 민혁이 먹일 이유식도 준비해야 했다. 이유식과 반찬은 사다 먹어도 되고, 청소도 쉬엄쉬엄하면 되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모든 걸 내가 완벽하게 다해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었던 것 같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데다 모든 일을 기를 쓰고 다 해내니 나는 점점 지쳐갔다. 만삭의 몸으로는 큰아이를 안아주는 것도 버거웠다. 둘째 출산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출산만 하면 덜 힘들겠지 싶었다.

딱 그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 딸 민서가 태어나고  병원에 입원해있는 3일 간만 딱 편했다.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일주일이 체 걸리지 않았다.

 


비교적 순한 편이었던 민서는 이상하게도 날이면 날마다 같은 시간에 1시간씩 빽빽 울어댔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그 조그마한 게  얼굴이 새 빨개지도록  서럽게도 울어댔다. 병원에서는 영아산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민서가 그렇게 우는 시간엔 계속 민서를 안고 달래야 했다. 그러는 동안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민혁이는 이리저리 다니다가  넘어져서 다치고 울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 한 시간 사이에 내 영혼은 내 꺼가 아니었다. 그 난리는 민서가 태어나고 삼 개월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무 빨리 동생이 생겨버린 민혁이도 스트레스가 많았으리라 짐작한다. 갑자기 엄마 아빠의 관심을 동생과 나눠갖게 된 민혁이는 가만히 있는 민서를 툭 치고 가거나, 갑자기 밀기도 했다. 동생에 대한 질투가 그런 행동으로 표출되는 거라 했다. 큰 아이에게 늘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는데도, 아이의 마음을 다 채울 수 없는 듯해 마음이 많이 아팠다.

민혁이는 약간의 퇴보적인 행동도 보였다. 분유에서  이유식으로 바꿔야 하는 시기였던 민혁이는  이유식을 충분히 먹었음에도 동생이 분유를 먹을 때마다  자기 것도 달라고 떼를 썼다. 이유식을 듬뿍 먹고도 잠을 잘 때마다 분유병을 물고서야 잠들었다. 20개월이 다 되어서야 민혁이는 분유와 이별을 했다.

남들보다 너무 이른 시기에 동생을 맞이해야 했던 민혁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세심히 살피려 노력했지만, 부족한 부분은 분명히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큰아이에 대해 그 짠한 마음이 남아있다.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는 마트를 가려면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야 했다. 둘째는 뒤로 업고,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첫째는 앞으로 안고 장을 보러 다녔다.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나가는 동네 아줌마들은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이고. 힘들어서 어째."

지금이야 그런 말 들으면 "그러게요." 하면서 웃어넘기겠지만 그때는 그런 걱정 어린 말들도 죄다 듣기 싫었다.

마음의 여유가 하나도 없었던듯하다.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은 날들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듯했다.



둘째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나서는 아파트 놀이터에 갈 일이 많아졌다. 둘째는 유모차에, 첫째는 자동차 구르마에 태우고 양손으로 두대를 밀고 다녔다. 놀이터에서도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애들은 우당탕탕 넘어지곤 했다. 그래도 집에서 두 아이들을 보는 것보단 놀이터에서 놀리는 게 더 수월했으므로 날이 좋으면 뻔질나게 나돌아 다녔다. 밖에 나가면 다른 아기 엄마들과 대화라도 할 수 있어서 숨통이 트이는 듯도 했다.

하지만 놀이터에도 복병은 있었다. 놀다가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되면 둘 중의 한 명은 꼭 길에  드러누웠다.  

더 놀아야 한다고! 안 들어간다고!

우는 애를 어르고 달래다가 안되면 들쳐 안고 구르마랑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가야 했다. 아휴.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절로. 젊었으니 가능한 일들이었다.



당시의 우리는 외식을 일절 하지 않았다. 아이 둘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게 더 힘들었다.

두녀석다 냅킨을 죄다 뽑으려 들고, 수저통의 수저를 죄다 꺼내려하고, 툭하면 물을 엎지르고, 물컵으로 테이블을 탕탕 내리치고, 못하게 하면 빽빽 울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이유식을 가져가 먹이려들면 지혼자먹겠다고 난리 치면서 먹다가  바닥에 흘리는 게 더 많아 치워야 하고. 이리저리 눈치도 보이고. 아휴.  

한두 번 식당에서 밥을 먹어본 이후로 애들이 좀 클 때까지는 외식을 안 하기로 했다. 차라리 내 집에서 내가 밥을 해 먹는 게 더 편했다.



화장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영아기의 아이들은 수시로 엄마 얼굴을 만지고 그 손을 물고 빨고 했으므로 내 얼굴에 스킨 하나 바르는 것도 꺼림칙해서 3년 정도는 화장품에 손도 대지 않았다. 늘 긴 머리는 질끈 묶고, 헐렁한 원피스에 화장기 하나 없는 몰골로 생활하다 유리문에 비친 나를 보면서 점점 자신감도 떨어지고 나라는 존재가 없어진듯한 공허함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은 새벽 6시 30에 출근해서 저녁 8시가 넘어서야 퇴근했으므로 두 아이의 육아는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했다. 아이들이 일찍 자야 하므로 아빠가 올 때까지 안 씻길 수도 없어서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나면 진이 빠지는 듯했다.

늘 남편 퇴근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렸다. 남편이 와서 애들을 돌봐줘야 그나마 마음 편히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이 회식이라도 하는 날에는 부부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난 이렇게 하루 종일 종종거리고, 나라는 존재감도 잊고 힘들어 죽겠는데, 회식 가서 술 진탕 먹고 집에 와서 혀 꼬부라진 소리 내는 남편이 정말 미웠다.

남편이 회식을 자주 가는 것도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이었다. 그래도 얄미웠다. 남편은 남편대로 회식이 노는 게 아니라 사회생활의 연장선인데 그걸 이해 못하고 바가지를 긁어대는 내가 미웠을 것이다.  

우리의 다툼은 잦아졌다. 그때의 우리는 지쳐있었고 서로의 힘듬을 상대방에게 이해받고 위로받기만을 바랬던 것 같다.


어쩌다 가끔 그 시절 생각을 하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젠 그 싸웠던 기억마저, 힘들었던 기억마저 추억이 되었다. 들었던 기억들은 희미해지고 아이들 때문에 행복해하고 웃던 기억들만 가득하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어렸던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 시절의 남편과 나. 우리 정말  애 많이 썼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순없지만 지금까지처럼 잘 헤쳐나갈것이다. 우린 엄마 아빠니까.



이전 01화 꽃보다 니 둘 #1 나는 연년생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