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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앵두 Oct 27. 2019

엄마에게 가는 길 #5 서로의 인생에서 나가줘. 제발.

#5 서로의 인생에서 나가줘. 제발.

따르릉.

"여보세요."

"......................."

길고 긴 침묵.

잠시 숨을 고른다. 입술이 마른다.  

"여보세요?"

"아빠야."

6개월 만이었다. 아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절망스러 마음에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나 가슴 졸이며 지낸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어디냐고, 어떻게 지냈냐고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눈물이 입을 막아버렸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신세계 백화점으로 나와. 아빠랑 밥 먹자."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엄마한테 얘기하면 당장 이 인간 잡으러 간다고 난리 칠 게 뻔했다.


멀리서 바라본 아빠의 모습은 초라하고, 수척해 보였다. 머리는 염색을 하지 않아 반 백발이 되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학교는 어떻게 다니고 있어?"

"휴학했어. "

"다음 학기엔 복학해라. 아빠가 돈 마련해 볼게."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았던 아빠는 대학 다니던 딸의 학비가 못내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앉자마자 학교 얘기부터 물어본다.

무슨 수로 그 큰돈을 마련하겠는가. 한 학기가 아니라 한 일 년 정도 휴학하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던 나는 대화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아빠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어.  아빠 잘 지내고 있어.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삼키는 것 같이 까끌까끌했었는데,  그래도 이젠 안 그러네."

"어디서 지내고 있어?"

"방 하나 구했어. "

"돈은 어디서 나서"

"차 가지고 나간 거 팔고 그걸로 보증금 내고. "

"생활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데?"

"아는 형네 건축사무소 나가서 이일 저일 알아보고 있어."


IMF로 모든 것을 다 잃고도 건축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빠는 여전히 그 분야를 기웃거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빠의 재기에 대한 집착은 그 이후로도 족히 10년은 넘게 계속되었다.

설계도면을 들고 매일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지방으로 업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조금 있으면 법인 만들 거란다. 아빠는 신용불량자이니 내 이름을 대표로 내세워서 사업을 할 거란다.  때가 되면 명의를 빌려달란다. 하지만 그때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아빠의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곁에서 봤던 아빠의 모습은 다 무너져가는 집을 붙들고,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형국이었다. 한 때 잘 나가던 시절의 망상에 사로잡혀 현재의 무수히 많은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었다. 아빠는 그렇게 과거의 영광을 다시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안된다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늙어가는 초라한 빈털터리 남자에게 어느 누가 기회를 줄 것인가. 어느 누가 투자를 할 것인가. 어느 누가 그 남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겠는가. 세상 경험 별로 없는 내가 보기에도 영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친구나 선배 사무실에 나가서 컴퓨터를 빌려 쓰고, 설계도면을 그리고, 서류를 작성했다.

나는 저러다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아닌지, 사람들이 앞에서는 떠받들어주는 척, 이야기 들어주는 척하다가 아빠 뒤통수에 대고 비웃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때론 아빠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빠가 헛된 꿈에 사로잡혀 수입 없이 지내는 동안, 아빠는 방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을 다 깎이고  그 원룸에서  쫓겨났다. 당시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며 푼돈을 모으고 있던 나는 아빠에게 보증금 500만 원짜리 다른 월세방을 구해주었다.  아빠가 가망 없는 일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리고, 제발 소일거리라도 찾아서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비를 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빠에겐 내색을 하지 못했다. 아빠의 집념은 마지막 오기인 듯했다.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빠 인생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미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여전히 종종 통곡을 했다. "으으으으..." 하는 그 울음소리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꺽꺽대는 소리였다. 그 울음소리는 나를 극한으로 치닫게 했다. 그 울음의 말미에는 늘 아빠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이 병신 같은 새끼. 확 어디 가서 뒤져버려라. 모든 걸 다 나한테 떠 넘겨놓고, 지 새끼들 다 버리고 지만 살겠다고 나가는 새끼. 나가려면 몸만 나갈 것이지, 하나밖에 안 남은 차는 왜 가지고 나가!"

그러다가는 "이 인간 어디 가서 죽었나 봐. 이 불쌍한 인간 찾아야 되는데.. 찾아야 되는데.. 으으으으.." 당시의 엄마에겐 두 개의 인격이 있는 듯했다. 아빠에 대한 분노와 연민의 감정이 공존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대면하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아빠와 연락이 되고 있다는 것은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예전처럼 만나서 서로를 치고받고 싸우고, 악다구니를 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다. 엄마의 인생에서 아빠를 지우고, 아빠의 인생에서 엄마를 지우고 싶었다.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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