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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순간은 계속된다

내 안의 여성성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며

by 최물결

내 생에 전신마취라니 그것도 두 번이나. 첫 번째 수술 후 두 번째 수술을 기다렸다.

수술 후 회복 시간도 필요했고, 오늘 수술을 했다고 내일 바로 수술을 할 수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내 마음이었다. 더러운 암덩이를 가슴에이고 생활한다는 불쾌감부터, 세상을 원망했다. 딱히 악행을 저지르면서 산 적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을 도우면 도왔지 안 좋게 생각한 적도 없다. 세상을 억까하기 시작했다.


왜 내가 암에 걸렸냐고, 의사에게 물었지만 ‘암’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세상이 새까많게 보였다. 속이 느글거리고 답답했다. 내 앞에 무수한 선택지가 펼쳐졌다. 첫 번째 암 진단 이후 브라카 검사를 하고 갔다. 브라카(BRACA) 유전자 검사는 내 몸에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다.


이 녀석은 DNA 복구 기능이 저하되어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분열될 수 있다. 가족력을 통해 대물림될 수도 있 유전자검사는 당연히 해야 했다.


차라리 돌연변이 유전자가 나왔다면 다행이었을까? 그랬으면 부모님을 하염없이 원망했을거다. 나는 내가 암에 걸린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암에 걸리게 한 무언가가 있다면 욕을 한 사발 했을 것이다. 암 환자는 어느날 난 교통사고라고 본 적이 있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나일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 브라카 1,2 유전자는 없었다.


수술 전 외래를 한 번 더 잡아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했다. 당시 내게 선택지를 주셨다. 브라카 유전자가 있으면 반대쪽 가슴에도 암 발병 가능성이 높다고.


필요할 경우 자궁을 없애는 수술을 한다고 했다. 브라카 유전자 결과가 나오기 전 또 한 번 고민했다. 가슴에 암덩이를 이고 살기 싫었다.


“전 절제를 하면 인공으로 살을 채워 넣나요?”


전절제를 염두에 두고 하고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아직 젊은데, 아기는요? 모유 수유도 해야 할텐데”


“아기, 낳게 되면 분유 먹이면 되죠. 요즘 잘 나와있잖아요.”

전 절제를 하면 방사선도 할 필요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걱정하며 살 바엔 깨끗이 없애고 싶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은 없었으니까. 함께 고민해 줄 사람도 없었다.


엄마가 있었으면 주변 지인들을 통해 엄청 물어봤겠지. 선택을 하라던 선생님에게 내 모습이 극단적으로 보였나 보다. 아직 0기고 젊으니 부분절제가 좋다고 내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평생 여자다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슬펐다. 가슴도 사라지고, 자궁도 사라지면 어떤 기분일까? 내 성별이 부정당한 것 같았다. 내 암은 호르몬 수용체 양성 유방암이다. 여성호르몬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때문에 억제하는 호르몬 약도 5년간 먹어야 한다. 약을 먹는 동안 아기는 가질 수 없다.


임신을 하면 아기가 기형으로 태어날 확률이 있어 주치의와 상담을 해야 한다. 결혼 예정은 없지만 약을 복용하는 중엔 아기를 못 갖는다. 5년 후 나는 마흔한 살, 노산이다.


두 번째 수술 전 산부인과에 들렸다.

미세석회화를 그냥 넘기려 했을 때 선생님은 내게 검사 예약을 잡으라며 신신당부했다. 얼마 전 갔을 때 자궁에 0.9cm 용종 외에 난소에 5cm 물혹이 있었다. 수술 후 요양하려고 절에 들른 적이 있다.


나는 약사여래불상 앞에 서서 빌고 또 빌었다. 그덕일까 난소 물혹은 사라져 있었다. 항암을 하지 않아 난자동결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라 생명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따로 협진을 잡지 못했다. 항암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자 냉동이야기가 나오니 선생님이 무슨 소리 하냐며 나를 다그쳤다. 난자 냉동은 돈과 시간이 들지만 그걸 제외하고 현재 치료에 집중하라고 했다. 애를 못 낳는 건 아니라고.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할 수 없다 생각하니 최후의 보루가 필요했나 보다. 선생님 어머니는 나와 똑같이 난소암으로 어릴 때 돌아가셨다. 진료를 받을 때면 눈빛은 측은한데 목소리는 씩씩하게 나를 맞이해줬다.


“난 이담씨가 치료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내 딸이 지금 상황이었으면 애 안 낳아도 된다고 말할 거야”

난자를 얼리기 위해선 여성호르몬을 몸속에 인위적으로 넣어야 하고, 한다고 해서 난자가 엄청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선생님의 한마디에 참고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 걱정해야 되는 건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엄마의 부재 이후, 이전까지 결혼 생각이 아예 없던 난 막연하게 화목한 가정을 꿈꿨다. 남은여생 아프고 늙더라도 함께 보듬어줄 가족을 원했나 보다. 선생님이 조용하게 우는 내게 휴지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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