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프지만 아메리카노는 포기 못해

나의 가장 사소하고 소중한 사치

by 서이담


“아메리카노 먹으면 안 돼요?”


수술 후 깨 간호사 선생님께 건넨 첫마디. 정신은 혼미한데 며칠 못 먹어서 몸의 2%가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아픔을 이겼다. 바로 못 먹는단다. 선생님은 물도 몇 시간 후에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잠에서 깨 기지개를 켠다. 정신은 드는데 또렷하지 못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가 머그컵에 얼음을 가득 담는다. 자연스럽게 커피 머신으로 손이 간다. 쫄쫄쫄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니 괜히 허공 위로 코를 킁킁댄다. 고소하고 깊은 향이 머리를 감싼다. 뜨겁게 김이 오르는 아메리카노 한 잔. 정말 다행히도 의사 선생님은 커피를 마셔도 괜찮다고 내게 말했다. 당이 듬뿍 든 라떼 종류보다 아메리카노를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만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너무 진하게 마시는 것보다 연하게 마시는 편이 좋고 마신만큼 물을 마셔주는 게 좋단다.


평소에도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닌데 암에 걸리기 전보단 많이 마시려고 노력 중이다.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아 항상 책상 위에 물 잔을 두었다.




내가 이토록 커피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게 커피는 단순하게 마시는 습관의 영역이 아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커피 향이 공기를 채우면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쓴맛이 입안에 감도는 동안 내가 견뎌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치료와 검진, 병원 대기 시간, 일하기 전 커피 한 잔은 내 곁에 있었다. 그러니까 고통을 이겨낸 나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침은 커피로 시작하면 뇌에서 오늘도 잘해보자는 에너지가 솟는다. 일명 각성효과다.

보통은 아메리카노의 쓴맛을 되뇌며 인생의 쓴 경험을 상기시킨다는데. 내게 커피 한 잔은 하루를 시작하는 생명수다. 커피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머리에 새겨준다. 병원 근처 카페에서, 사소한 일상에서, 친구와의 약속에서 커피는 늘 나를 사람들과 이어주었다. 회사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면 직접 뽑은 커피 한 잔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것처럼.


술, 담배, 가공육류 등 제한되는 음식이 몇 가지 있다. 아직까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이 생각나면 무알코올을 마시며 ‘이건 술이다’라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커피를 마실 때도 나름의 타협점을 만들었다. 진한 커피 한 잔 대신 연하게 여러 잔을 마신다. 투 샷은 원샷으로 쓰리샷은 투 샷으로 말이다. 너무 진한 경우에는 물이나 얼음을 더 섞는다. 어쩌면 내 하루 루틴 속 고집스러운 습관일 수도 있다. 커피와 물 생활 속 절충안이 생겼지만 정신이 흐리멍덩하다 싶으면 조금 진하게 마실 때도 있다. 아메리카노의 쓴맛과 순수함이 균형을 이루듯이. 커피는 내 하루를 지탱한다.


어쩌면 나는 커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매개로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소소한 행복의 원천은 뭐가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묻는다. 한번 오늘 하루를 떠올리며 내게 힘을 주었던 ‘그 무언가’를 생각해 보자.


커피의 쓴맛은 내 인생의 상처를 닮았지만 그 뒤에 남는 은은한 향처럼 삶은 여전히 깊고 따뜻하다. 나는 오늘도 그 맛으로 다시 살아간다.

커피 한 모금 마셨으니 펜을 들고 글을 적는다. 자 시작이다.

keyword
이전 21화드라마 속 암 환자들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