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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의 식은 치킨과 김 빠진 맥주

back to the 2013

by The Answer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한 가을은 가끔씩 혼자서 야구 보는 것을 즐겼다. 사실, 주변에 삼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탓이 컸던 까닭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구는 삼성 왕조의 본거지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이 지역을 해석하는 경향이 짙었다. 가을은 색안경을 끼고 자신의 고향을 대하는 그들을 대할 때면 불쑥 치솟는 할 말들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투로 웃어넘겼다.


2013년 9월 가을의 문턱, 가을은 이날도 어김없이 치맥을 옆구리에 끼고 야구장에 앉았다. 서울 목동 운동장으로 향한 그는 삼성 라이온즈와 넥센 히어로즈의 경기를 직관하며 응원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는 경기장 한가운데서 서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즐겁게 치맥을 즐기며 직관하고 있는 그때, 문득 머릿속에 스쳐가는 108개의 매듭으로 이루어진 야구공 하나가 있었다.


‘저 공 하나가 선수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에 가을은 혼란스러워졌다. 불교에서의 108 번뇌도 아닌데 질풍노도의 시절에나 해볼 법한 존재론적인 의문에 가을은 그 좋아하는 치킨이 점점 식어가는지, 맥주의 톡 쏘는 시원함이 달아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고민에 빠져버렸다(물론 식은 치킨이 지닌 그만의 맛도 인정하지만) 30대 초반 교직에 들어선 사회 초년생 가을은 질풍가도할 시기에 뜻밖의 장소에서 다소 황당한 질문에 마주하게 되어 당황했던 것이다.

가을은 "일구입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이 말은 일본 야구계에서 자주 쓰는 용어란다. 만화 테니스의 왕자와 하이큐에 종종 등장하기도 했다). 어릴 적 농구를 배울 적에 감독님이 프로드로우를 자주 놓치던 가을에게 조언했던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잔소리로만 치부했었던 이 단어가 야구장에서 생각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이 말은 불펜진에게 더욱 와닿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 투입되었던,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마운드를 책임지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중간 계투진과 마무리 투수는 공 하나에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공 하나를 던지기 위해 보이지 않는 불펜(20세기 초 야구장 외야 쪽의 광고판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로데오 경기에서의 소들이 대기하는 장소를 뜻한다는 설이 있다)에서 수 십 개의 공을 던지며 어쩌면 오르지도 못할 수도 있는 불안정한 상황을 인내하며 희망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가을은 1982년 이래 단 한 번도 야구 "진지충"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기분 좋은 상태였다(당연히 김 빠진 맥주는 마시지 않았다. 얼마나 맛이 없는지는 당신들도 알지 않은가.). 그래서 이제 가을은 야구 철학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식은 치킨과 김 빠진 맥주로 야구 돋보기'라고 해두자. 가을은 자신의 생각에 조금은 상투적이고 올드한 느낌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는 것 같아서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는 고척돔으로 이전하기 전 2015년까지 목동 야구장을 홈구장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 당시 삼성은 7이닝까지 앞선 경우 144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갔었다. 권오준, 안지만, 끝판 대장 오승환으로 이어지는 불펜진이 뒷문을 확실히 걸어 잠갔기 때문이었다.




"식은 치킨과 김 빠진 맥주로 야구 돋보기"의 장인 '꼴값' 가을 선생은 또 혼자서 야구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두산의 홈인 잠실 야구장(엘지 팬에게는 미안하지만 쌍둥이보다는 곰이 우직한 것이 마음이 더 가는 게 사실이다. 물론 승짱이 몸담았던 팀이었던 것이 한몫을 하고 있다).

가을은 야구장 입구에서부터 푸른색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이들 모두는 정맥만 있을 것 같다). 생애 처음 보는 그들에게서 가을은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감정이 샘솟았음을 눈치챘다. 가을은 야구장을 마주하면서 그 흥분은 절정에 다다랐다. 가을의 눈앞에는 답답한 가슴을 통쾌하게 뚫어주는 드넓은 공간, 푸른색과 흰색의 극명한 색채(억지스럽긴 하다만 그런 걸로)를 띤 양측의 만원 관중들, 그리고 그들의 함성소리가 가을의 심장을 마구 치는 듯했다. 실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가을을 흥분시키는 것은 야구장의 응원이었다. 좋아하는 팀을 남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목청껏 응원할 수 있다는 점, 미친 듯 응원해도 어느 누구도 본인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 마치 클럽에서 스피커 앞에서 마음껏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그 자유로움이 가을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내가 성인이 된 후 무언가를 이토록 즐기고 좋아했던 것이 있었던가.'


가을은 농구를 그만둔 후 처음으로 이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가을은 농구공을 손에서 놓은 후 새로운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었다. 남보다 못 배운 지식과 기술들을 뇌에 새기고 몸에 체득해야만 했었다. 무엇 하나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언변, 운동능력, 글쓰기, 책 읽기 등 무엇하나 남보다 나은 재능이나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남보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할 수 조차 없었다. 가을은 그저 어제보다 나아져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냥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한동안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였기에 야구장에서 느낀 자유로움에서 삶에서의 해방감을 느꼈던 것이다.


잠실은 타구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웅장함과 열기로 가득하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 훅~하고 불어오는 바람에는 홈런의 통쾌함과 적시타의 짜릿함,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이 묻어 있다.


삼성과 기아, 엘지(잠실 라이벌전 경우) 외 나머지는 모두 1루를 홈 더그아웃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삼성은 어웨이 경기에서도 홈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어릴 적의 가을은 누구보다 야구를 잘하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다. 그래서 "성당동 사자들"에서 누구보다 열심히였던 그였다. 폐타이어를 찢어질 정도 열심히 타격 연습에 매진했고 야구 관련 책을 사서 공의 그립법을 터득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런 그였기에 옆 동네 팀에게 경기에서 질 때면 해가 질 때까지 콧물이 마를 틈도 없이 질질 짜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13년의 가을은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물론 이기면 좋지만 지더라도 목청껏 응원하고 경기 순간순간을 즐겼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야구를 더 이상을 하지 않는다. 간단한 캐치볼 정도말 할 뿐이었다. 이마저도 주변에 글러브를 갖고 있는 친구가 없었기에 애꿎은 학교 담벼락만이 가을의 쓸쓸한 공을 받아주었다.

이제 가을은 야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게 너무 좋았다. "꼴값" 가을 선생은 이렇게 무언가를 즐길 수 있다는 자체에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야구를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교사가 된 가을은 자신이 느낀 감정들을 아이들과 공유하길 바랐다. 아이들이 야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좋아하게 하면서 기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본인의 역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이닝에서의 못다 한 얘기는 다음 이닝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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