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서 부글부글 천불이 났다. 멜버른 시티에서 30분 넘게 기차를 타고 도착한 쇼핑몰이었다.
분명 구인광고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풀타임을 뽑는다고 했었는데, 이제 와서 마감 파트타임이라고 말하다니.
선글라스 매장답게 한국인 여 사장은 까만 선글라스를 머리에 쓰고 다른 선글라스는 티셔츠 앞섬에 걸려있었다. 다리는 꼰 상태에서 말을 이어갔다.
"집이 시티에 있어요? 거리가 꽤 멀지 않아요? 마감하실 수 있겠어요? 밥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셔야 해요"
시급 7.5불 받으면서 왕복으로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4시간 아르바이트는 나에게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렇게 백수생활 3개월 만에 찾아온 기회는 김 빠지게 끝이 났다.
시티로 돌아가는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들이 왠지 모노톤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창밖을 보고 있던 그때 맞은편에 앉은 5살짜리 귀여운 꼬마 숙녀가 나를 보며 웃었다. 고사리 같은 저 작은 손으로 나에게 안녕하고 인사했다. 은근한 위로를 받은 느낌에 나도 손을 흔들며 미소 지어 보였다.
'뭐, 외곽 여행 왔었다고 샘 치지 머. 교통비와 시간을 고려하면 외곽보다는 시티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몇 시간 사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다시금 풍경이 컬러로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고 어느 카페에서 연락이 왔다.
"아유 김자까자까? 두유 해브 타임 포 인터뷰 투모로우?"
"예스! 예스! 오브콜스~"
바리스타에 지원했었던 수많은 카페 중에 유일하게 연락이 온 곳이었다. 구글 맵을 보니 전에 일했던 화로구이 고깃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다행히 헤매지 않고 한 번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나도 드디어 멜버른의 감성적인 카페 중 한 곳에서 멋지게 바리스타로 일할 수 있겠구나'
한껏 들뜬 마음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카페로 향했다.
턱수염이 찐한 이태리 아저씨가 나를 반겼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여러 가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바로 라떼를 만들라고??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밀크저그에 우유를 넣고 스팀을 치기 시작했다.
우유거품은 순식간에 괴성을 지르며 게거품이 되었고, 수염 덥수룩한 카페 사장도 곧 게거품을 물것 같은 표정이었다. 양손으로 살짝 머리를 만지더니 이내 체념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영어가 안 통해도 이건 백 퍼센트 육감으로 알 수 있었다.그렇게 나는 면접 본지 5분도 안 돼서 광속 탈락을 하였다.
'칫.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가르쳐 주면 잘할 텐데... 칫'
이 후로도 또 다른 카페, 식당에서 면접을 보았고 번번이 나는 탈락했다.그래도 면접을 자꾸 보다 보니 나름 영어 커뮤니케이션에도 도움 되고, 거절당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뭐 하나는 걸리겠지'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에 지원해 본 부잣집 하우스키핑 자리에서 연락이 왔다.브라이튼 비치 쪽 찐 부자들이 사는 동네인데, 집에 상주하거나 출퇴근하는 하우스키퍼를 찾는 광고였다. 시급이 무려 시간당 20달러였다. 시간당 20달러면 올해 말까지 충분히 만불을 모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기차를 타고 구글 맵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찾은 그곳은 대저택이었다.진심으로 입이 떡 벌어지는 외관이었다.
매우 높고 큰 검은색의 철로 된 대문, 높디높은 담벼락, 저 멀리 보이는 주황색 벽돌의 저택 2채와 뾰족한 지붕, 우거진 나무들. 영화에서만 보던 그런 집이었다.
"딩동, 오늘 면접 보기로 했던 김자까자까입니다"
"들어오세요"
'덜커덩'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나는 들뜬 마음에 잔디밭을 걸으며 저택 입구까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철대문에서 저택 입구까지 어찌나 멀던지 지하철 승강장 끝에서 끝까지 거리쯤은 되어 보였다. 절반 정도 갔을 무렵 저택 현관문이 열리면서 왠 시커먼 물체들이 보였다.
"컹컹컹"
까맣고 큰 개 두 마리가 나를 향해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생각이난 하우스키퍼 조건.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 뽑습니다'
'젠장... 강아지가 아니잖아.. 근데 무서워하면 안 뽑아 줄 것 같아... 아.. 어떡해...'
최대한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웃으며 시커먼 개 두 마리를 반겼다. 등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컹컹 짖으며 달려들 때는 진짜 오줌 지릴뻔한걸 간신히 참았다.
도베르만 2마리 때문에 없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백발의 점잔은 50대 백인 아주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색 샤넬 정장을 입고,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올림머리로 아주 깔끔했고, 구두는 굽 5cm짜리 블랙 펌프스였다. 나를 응접실로 안내하고는 잠깐 티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잠깐 본 저택 안은 정말 화려했다. 복도는 마치 갤러리 같았다. 응접실 역시 호화로운 갤러리 같았다.
금색 휘황 찬란한 샹들리에와 명화가 잔뜩 붙어있는 벽, 뭔가 비싼 방향제를 쓰는 듯한 매혹적인 향기, 있어 보이는 화병들엔 저마다 이름 모를 화려한 꽃들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19세기 찻잔에 잉글리스 블랙퍼스트 티를 챙겨 온 그녀는 자신을 이 저택의 집사라 소개했다. 일한 지는 30년이 되었다며 현재 채용하려는 포지션은 큰 저택 말고 작은 저택에 일할 하우스키퍼를 찾고 있다고 했다.
교양이 철철 넘쳐흐르는 인간 샤넬 집사는 집안을 보여주며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다. 거실 복도 한쪽엔 수많은 가족사진 액자들이 놓여 있었다. 머리 백발의 할아버지와 젊고 예쁜 여자 그리고 자녀로 보이는 5명의 아이들. 저택 주인인 할아버지는 장가를 3번 갔고, 지금 저 액자 속 웃고 있는 여자는 3번째 부인이라고 했다.
'역시.... '
손님 응접실용 침실과 세탁실을 보여주면서 설명이 이어졌는데, 세탁실이 우리 집 보다 훨씬 컸다.
그냥 대형 세탁소였다. 뭐든지 어디든지 화려했다.
1시간 넘게 인터뷰는 이어졌고 영어를 잘 못하는 동양인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복도에서 문이 열려있는 방이 하나 보였다.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보니 엄청나게 화려한 방이었는데 자주색 벨벳으로 된 고급스러운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소파 중앙엔 하얀색 털에 양쪽눈 컬러가 다른 오드아이 고양이 한 마리가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그래, 네가 오늘 면접 보러 온 네 번째 닝겐이구냐옹~"
한없이 무료한 표정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살면서 봐온 집 중에 제일 부잣집은 단연 이 집이었다. 영화 속이 아닌 실제 나의 눈으로 바라본 상위 1%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수영장과 테니스코트가 있는 저택, 숲처럼 우거진 앞마당, 기름기 반지르르한 털을 가진 도베르만과 세상 도도한 고양이, 그리고 인간 샤넬 집사까지. 혹시 면접에서 떨어지더라도 나에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상대적 박탈감도 들었지만 나도 부자가 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