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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환 Oct 21. 2024

도청 - 2





 대학로의 노른자 땅에 위치한 그 고깃집 내부는 손님들로 붐볐다. 나는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의 얼굴부터 살폈다. 홀과 주방에 젊은 여직원이 서너 명 있어 그중에 누가 윤영주인지 바로 알 수 없었지만, 얼마 안 가 그녀가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가 빈 테이블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식당 매니저가 바쁜 자신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러 우리를 맞이하도록 했다.

 “영주야! 손님!”

 막 다른 테이블의 빈 접시를 치우던 그녀가 매니저의 부름에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그녀의 첫인상? 대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선하고 깨끗했다. 나는 그녀가 내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메뉴에 대해 거듭 물어보며 자꾸 그녀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맑고 깊은 눈, 작고 도톰한 입술, 양 볼은 발개져서 귀여웠고, 눈 바로 아래에 있던 작은 점도 사랑스러웠다. 내가 두 눈으로 본 그녀는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더욱 괜찮은 여자였다. 이후 밤이 깊도록 그곳에서 술을 마셨지만, 나는 그때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한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손님들을 맞이하던 그녀의 그 싱그러운 미소만 여전히 기억한다.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나는 다시 특공대 동문 초소 전화기를 뚫었다. 오석호는 여전히 그의 두 번째 애인인 엄지 공주와 통화했다.

 -소연아. 전에 친구들이랑 술 마실 때 기억나? 네가 테이블 아래 있던 내 허벅지에 손 올렸잖아. 그때 나 엄청 흥분되더라.

 나는 윤영주가 가여웠다. 그녀는 일 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 남자 친구가 이렇게 밤마다 다른 여자와 음담을 나눈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이번에 나오면 내가 더 흥분하게 만들어줄게. 오빠.

 나는 오석호가 괘씸했다. 어떻게 윤영주 같은 괜찮은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걸까?

 -아아! 어떻게! 우리 엄지 공주 혹시 응급 처치할 줄 아니?

 -왜 그래 오빠? 어디 아파?

 -응. 방금 너 때문에 내 심장이 멎었거든.

 나는 도저히 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김 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뱀. 오석호 알아?

 -누구? 오석호? 아! 그 특공대 카사노바? 야. 나는 밖에 나와도 거들떠보는 여자 하나 없는데 그 새끼는 어떻게 군대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그런 능력이 다 있을까? 아주 난 놈이라니까.

 -김뱀. 나 부탁할 게 하나 있어.

 -크, 내가 또 우리 유재현 병장 부탁은 거절 못 하지. 뭐야?

 -나 대신 쪽지 하나만 써서 걔 여자 친구한테 전달해 줘.

 나는 오석호가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윤영주에게 알리기로 결심했다. 오석호와 박소연의 통화 내용을 엿들을 때마다 윤영주의 선한 얼굴이 자꾸 아른거려 그녀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윤영주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 사실을 전할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발신인 정보를 적지 않고 편지를 보내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윤영주가 발신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역추적이라도 한다면 내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전화 역시 같은 이유로 선택하기 껄끄러웠다. 그러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김 병장이 생각났다. 내 예상대로 김 병장 역시 오석호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역시 오석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게다가 김 병장은 내가 오석호의 통화를 훔쳐 듣는다는 사실을 어디 이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야말로 둘의 통화를 실컷 뚫었으니까.

 나는 윤영주에게 전할 쪽지 내용을 김 병장에게 불러줬다.

 당신의 애인 오석호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믿지 못할까 봐 그 증거를 대겠습니다. 오석호의 두 번째 여자의 이름은 박소연. 별명은 엄지 공주입니다.

 당신은 참 괜찮은 여자입니다. 그러니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나세요.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행여라도 내 정체를 유추할 수 있는 빌미를 줄까 봐 되도록 말을 아꼈다.

 -재밌겠는데?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김 병장에게 나는 그녀가 일하는 고깃집의 상호와 위치를 알려주었고, 김 병장은 당장 주말에 쪽지를 전하겠다고 했다.

 이후, 나는 김 병장과 다시 통화하지 않고도 내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윤영주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미처 엿듣지 못한 통화로 그녀는 박소연의 이름을 대며 오석호를 추궁했을 것이고, 남자의 구차한 변명에 넘어가지 않고 그와의 관계를 끝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녀는 밤마다 꼬박 걸던 전화를 실수로라도 하지 않았다. 역시, 한번 헤어지면 뒤돌아보지 않는, 윤영주는 이별도 똑 부러지게 하는 멋진 여자였다.

 오석호는 이제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박소연과 통화했다.

 -그런데 오빠. 이렇게 평일에 통화해도 괜찮아? 평일에는 오빠 보초 안 선다며.

 -응. 갑자기 근무하게 돼서.

 응. 갑자기 헤어지게 돼서.

 -참, 소연아. 이번 휴가 때 우리 제주도 가는 거 1박 2일로 가지 말고 한 나흘쯤 있다 오자.

 -오빠 훈련 때문에 일찍 복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훈련이 갑자기 취소돼서.

 첫 번째 애인한테 갑자기 차여서.

 -와, 정말 잘 됐다. 오빠!

 -엄지! 나한테 여자는 너밖에 없는 거 알지?

 나는 이후로도 계속 둘의 통화를 엿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오석호가 불쌍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김뱀. 나 부탁이 있어.

 -뭐?

 -우리 쪽지 한 번만 더 보내자.

 -누구한테?

 -엄지 공주.

 -야. 뭘 그렇게까지 하냐?

 -그 여자도 불쌍하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같은 남자로서 오석호가 너무 괘씸하네. 대한민국 군인 망신 다 시키고.

 거짓말이었다. 윤영주에게 쪽지를 보낼 때는 분명 그런 마음이 있었다. 윤영주가 불쌍했고 오석호가 괘씸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나는 그저 재미있었다. 오석호와 윤영주의 통화 내용을 듣기만 하던 내가 아무도 모르게 둘의 관계를 끝내버렸다. 나는 단순히 그들의 통화를 엿듣기만 하는 청자가 아니라, 그들의 미래를 새로 써나가는 화자가 됐다. 그저 그 기분, 나는 마치 신이 된 듯한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김 병장은 처음과 달리 주저했지만 나는 결국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이 무른 것도 있지만 힘겨운 졸병 생활을 함께하며 서로를 의지한 우리에겐 남다른 유대감이 있었으니까.

 -그래 뭐, 하자.

 나는 김 병장에게 박소연이 일하는 미용실의 상호와 대략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부탁한 쪽지 내용은 전과 거의 비슷했지만 훨씬 짧았다. 박소연에게는 딱히 특별한 감정이 없어서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었다.

 당신의 애인인 오석호는 당신을 만나는 동안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믿지 못할까 봐 그 증거를 대겠습니다. 여자의 이름은 윤영주입니다.

 며칠 후, 나는 일을 마친 김 병장과 통화했다.

 -재현아, 근데 박소연이 일하는 미용실, 르망 헤어 맞지?

 -응 맞아. 왜?

 -미용실 들어가서 카운터에 있는 여자한테 쪽지 주면서 박소연한테 전해달라고 했는데 얘가 잘 모르는 거 같은 거야.

 -그래서?

 -디자이너 중에 키 작은 아담한 여자 있지 않냐고, 전해달라고, 그러고 그냥 나와버렸지.

 -그래? 그럼 혹시 그 미용실이 아닌가?

 김 병장의 말에 나는 혹시라도 동명의 다른 미용실에 쪽지가 전달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날 밤 오석호와 박소연의 통화를 듣고 쪽지가 잘 전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라고. 소연아.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윤영주가 누구냐고. 왜 놀라는데?

 -….

 -와, 진짜. 군바리가 바람피울 줄은 몰랐네.

 -소연아. 걔랑은 이미 끝났어. 낼모레 나가서 내가 다 설명할게. 우리 제주도 가서..

 -뭐? 제주도? 제주도 같은 소리 하네. 비행기 표 취소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여기 올 생각도 하지 말고.

 그 통화를 끝으로 나는 윤영주는 물론 박소연의 목소리도 영영 들을 수 없었다. 특공대 동문 초소의 그 전화기도 잠잠해졌다.

 그로부터 약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새벽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오침을 하기 위해 모포를 펴는데 행정보급관이 내무반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유재현. 너 특공대 가서 우리 제초기 좀 가져와라. 다 작업 나가서 중대에 놀고 있는 애가 너밖에 없네.”

 “박 상사님. 저 새벽 근무 서서 지금 자야 하는데 말입니다.”

 “갔다 와서 자 이 새끼야.”

 뻘게지도록 귀를 쥐어뜯긴 나는 깔던 모포를 다시 구겨 접고 부대 밖으로 나섰다. 처음엔 박 상사를 원망했지만 이제 한 달 뒤면 이런 일도 다 추억이 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져 주변 경치를 즐기기도 했다.

 특공대 연병장에서는 전투 축구가 한창이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간 나는 행정반에 들러 용건을 전했고, 일병 계급장을 단 행정 계원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데리고 한 내무반 안으로 들어갔다. 내무반 안에는 키가 크고 얼굴이 검게 탄 한 병사가 있었는데 그는 우리가 들어온지도 모르고 관물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간 행정 계원이 큰 소리로 경례했다.

 “선봉! 오석호 상병님. 혹시 며칠 전에 쓰신 제초기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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