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May 19. 2020

퇴사를 했다.


마지막 출근을 했다.

연차가 남아 있어서 실제 퇴사일은 아직 며칠이 남았지만, 출근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20년 가까이 일을 했고, 그 기간 동안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이 회사에서 12년이 넘게 있었다.

 

퇴사를 처리하는 담당자와 마지막 면담을 했다. 담당자는 별로 궁금할 것도 없는 질문 몇 가지를 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회사에 아쉬웠던 점을 말해달라기에, 희망퇴직 제도가 없는 게 가장 아쉬웠다고 얘기했다. 면담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팀별, 파트별, 프로젝트별로 나뉜 단톡방에 마지막 퇴사 인사를 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단톡방을 나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던 장애 알림방도 탈출했다. 쓰던 장비와 사원증을 사내 데스크에 반납하고, 얼마 안 되는 남은 짐을 쇼핑백에 넣고 회사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퇴사를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료주차권을 안 받았다는 걸 알고선,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서 '사원증은 이미 반납했는데 출입문은 어떻게 열지' 하는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출입문이 열려있었다. 주차권은 2시간까지만 무료인데, 2시간을 넘겨서 2,500원을 내야 했다.


집으로 오는 길은 아직 퇴근시간이 안 되었는데도 차들이 많았다. 이 시간에 운전을 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했지만, 딱히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라디오가 틀어져 있었는데,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퇴근길인데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별 느낌은 없었다.


핸드폰에 부재중 알림이 있어서 보니 엄마였다. 며칠 전에 마지막 출근일을 말씀드렸었다. 그걸 기억하시고 전화를 하셨나 했는데, 무릎 안마기가 전원을 켜도 작동을 안 한다고 하신다. 전기값 별로 안 나오니, 쓰지 않을 때에는 꼭 충전기에 꽂아두라고 말씀드리고 끊었다. 회사에서 짐 싸고 나와서 집에 가는 중이라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퇴근을 하고 왔는데도 아직 창 밖이 밝았다. 좀 낯설긴 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아내에게 연락해서 퇴사 마무리하고 집에 왔다고 말하고, 오늘도 야근하냐고 물었다. 아내는 요즈음 일이 많아서 매일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집에 왔었는데, 오늘은 축배를 들어야 하는 날이니 최대한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일렀지만 라면을 끓였다.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밥도 전자레인지에 해동해 남은 국물에 말아서 해치웠다.


마침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제법 큰 수술을 치른다고 했었는데, 무사히 잘 마쳤다고 했다. 목소리가 밝게 들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오늘 마지막 출근 마치고 집에 왔다고 했더니 부러운 시키 란다.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 면회가 가능하게 되면, 병문안 가겠다고 말했다. 퇴직금 받은 걸로 고기를 사달라는데, 수술만 아니었어도 '백수인 내가 왜. 돈 버는 너가 사' 했겠지만,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카톡이 조용하다. 읽지 않은 메시지도 없다.

각종 업무용 단톡방에서 급하게 처리할 내용이 오가는 단톡방은 카톡 알림은 켜두었었고, 미루어두었다가 처리해도 되는 단톡방의 알림은 꺼두었었다. 핸드폰을 열 때마다 알림이 울리지 않은 채 쌓인 메시지가 보였었다. 수시로 핸드폰을 열어, 쌓여있는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었다. 집에 와서도 몇 번이나 핸드폰을 열었는데 읽지 않은 메시지가 없다. 그제서야 퇴사한 게 실감이 났다.


드디어 퇴사를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