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두루치기만 볶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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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의 주메뉴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두루치기'라고 답했을 때,
"두루치기는 못 참죠. 맛있겠다."
메뉴를 고민할 때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답변들 속에 돼지 앞다리로 만든 두루치기는 약속이나 하듯 만장일치의 답변과 동시에 긍정과 맛있음의 반응이 넘쳤다. 그런 반응은 다른 고민에 빠지지 않고 대표 메뉴를 두루치기로 결정하게 해버렸다.
사실 오랜 시간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고 물 없이 볶듯 만드는 두루치기는 자신 있었다.
그런데 누구나다 하는 답변 속에는 함정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제일 맛있고 자신 있는 음식, 두루치기는 잘 선택한 메뉴였지만 이면에는 어디서나 흔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메뉴인 것을 뒤늦게 파악했다. 그것이 장점이 될 줄 알았다. 모두가 좋아하고 흔하게 먹으니 당연하듯 쉽게 선택할 줄 알았고 친근할 줄 알았는데 흔한 것은 다른 의미에서 누구나다 어디서나 사 먹고 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쟁력이 있는 듯 없는 대표메뉴를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고 메뉴 표기에 있어 두루치로 할 것인가 제육볶음으로 할 것인가도 고민했지만 제육볶음보다 두루치기라는 이름이 좋았다고 할까 받침이 없어서 발음이 쉬웠다고 할까.
제육볶음과 두루치기는 만드는 방법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국물이 조금 있는 것과 없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었고 지역에 따른 야채 첨가물과 김치를 넣는지 안 넣는지 등등 여러 가지 개인적 취향이 따라다녔다.
내가 만든 두루치기는 정확히 다양한 야채보다는 간과 잡내를 잡는 정도의 파, 양파, 양배추 정도이고 국물이 없이 빨갛게 볶는 것에 가까워 제육볶음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철판에 내놓을 수 있는 여지를 고려해서 두루치기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구인광고에서 본.... 단어는 충격적이었다.
"OO식당 두루치기 구함"
두루치기는 음식의 이름 아니었나 왜 구인광고에서 나오는 거지.
식당에서 여러 일을 맡아서 열심히 해줄 분들을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에 놀랍고 그렇다면 대표메뉴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돼지 앞다리로 만든 두루치기는 과연 재료는 합당한 지 들어간 야채들은 종류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고춧가루를 안 넣는 게 좋을지 넣는 게 좋을지 돼지고기는 어느 정도 두께가 좋을지 등등 생각에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처음 사용한 돼지 앞다리는 생고기였다. 생고기라 생각했던 돼지고기는 사실 생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있지만 대형마트서 흔하게 보이는 얇게 썰어진 부위를 사다가 사용했다.
그러다가 껍데기 비계부위가 골고루 적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원하는 부위가 두께를 맞춰주는 정육점을 찾았다. 고민하며 찾으면 때마침 딱 맞는 조각처럼 나에게 맞는 사람이 나타난다.
꾸준히 거래하는 정육점은 장점이 많다.
고기부위와 연육상태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메뉴에 대한 고민도 같이 해주기도 하고 맛이 어떤지 처음느낌이 어땠는지 자연스레 이야기해 준다. 때때로 손님을 모시고 오는 고마운 손님이 되기도 한다. 또한 비계와 껍데기가 있는 아주 얇은 앞다리를 사용할 수 있게 지속적인 관리를 해주며 늦은시간, 휴일에도 주문양을 맞춰주기도 한다.
얇게 썰어진 돼지 앞다리 부분을 준비해 두고 기름을 두른 팬에 파를 먼저 볶다가 양파와 양배추를 넣고 때에 따라 마늘과 당근을 넣기도 한다. 그렇게 고기를 바짝 익히고 야채수분이 고기에 재여지고 남은 수분이 다 날아갈 즈음 마지막 양념을 한다.
자작한 돼지 앞다리 두루치기, 국물이 거의 없고 얇지만 꼬들한 듯 꼬들하지 않은 그런 돼지고기볶음.
술고래밥상의 대표 메뉴이다.
대표메뉴지만 어느 날은 한 개도 안 팔리는 날이 있다.
사실 그런 날은 한 달에 한두 번이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어떤 날은 밥손님이 하나도 없고 술손님만 있다.
어떤 날은 가게 안에는 텅텅 비었고 배달어플로만 주문이 들어온다.
매일을 고민한다.
매일을 반성한다.
매일을 후회한다.
두루치기에 대한 무엇이 부족한 것이 알기 위해 기대하며 백종원의 육(돼지고기 편)을 읽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못 찾았다. 장사란 그런 것일까 시작은 했으나 완성되지 못한 일기 같은 것일까.
두루치기로 인연을 맺은 고객이 콜키지(술을 가져와 장소제공비를 내는)를 조심스레 문의한다.
언제든 미리 연락 준다면, 예약이 없다면 ok, 거절할 사유가 없다.
술보는 술을 좋아한다.
다양한 술을 구비할 수 없고 세상은 넓고 술은 다양하며 사는 동안 그 많은 술을 다 맛보지 못하고 죽는다.
대표메뉴는 두루치기지만 가게 이름은 '술보밥상'이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맥주와 소주, 음료수들과 먹기에는 부담 없지만 다양한 술과 무난하게 어울리지는 않을 수도 있다.
대표메뉴지만 술보밥상과는 늘 잘 맞을 수 없다.
그래 두루치기는 꼭 돼지고기일 필요는 없었다.
두루치기는 모든 것이 섞이고 어울리는 것이다.
주인도 손님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섞이고 테이블이 몇 개 없고 작아서 좋은 것은 그런 이유일테다.
가랑비에 옷 젖든 그렇게 스며든다.
고객은 떠나고 술병이 남았다.
글렌피딕 15년, 올몰트 위스키였다.
과거에 참 좋아했고 그리워했던 술, 콜키지 받길 잘했다.
덕분에 함께 한 잔 할 수 있었고 테이블에 준비된 물품들에 만족했다. 오랜만에 위스키를 만나 반가웠다.
이제 슬슬 위스키를 준비해야 하나...
깊은 산속 맑은 물만 찾아 마신다는 사슴처럼, 청아하고 맑으며 깊은 향을 가진 글렌피딕, 블렌디드 위스키에 비해 단점이 없으며 향이 길게 남는 여운이 깊은 술, 글렌피딕 한 병쯤은 구비해도 괜찮겠지.
한식을 파는 곳에 양주가 안 어울린다는 것은 고정관념이 맞을 테다. 술에 맞는 안주가 있으면 고기가 아닌 야채가 많이 들어간 두루치기라면, 철판에 야채 가득 두루치기라면 청하든 위스키든 브랜디든 다 어울리지 않을까.
고찰[考察]
1. 이리저리 생각하여 살피다
2. 연구의 대상 따위를 깊이 생각하여 살핌
- 다음사전에서
두루치기
철냄비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익혀먹는 음식.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일을 하며 배운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장사를 하면 더 배울 게 없을 것만 같더니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방문해 주시고 찾아주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