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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14화

어린이 디누 4

by 권재원

4

정우와 함께 했던 이 흥미로운 탐구 여행은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우리 집이 도곡동으로 이사 갔기 때문이다.

1979년의 강남구 도곡동은 오늘날의 그 도곡동이 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서울 속 시골이었다. 심지어 농촌 지도소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강남 세무서 이후에는 아예 포장도로가 끊어지면서 완연한 시골길이 펼쳐졌고, 길 가에는 시원한 옹달샘도 있었다.


양재천에서는 시골 아이들이 부끄럼도 없이 남자아이, 여자아이 섞여서 팬티 바람으로 멱도 감고, 미꾸라지나 개구리도 잡으며 놀았는데, 여길 그냥 징검다리로 풍덩 풍덩 건너 다녔다. 양재천을 건너는 다리들 중 자동차가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지금은 영동6교라고 불리는 다리 하나뿐이었고, 지금의 영동 4교, 영동 5교가 있는 자리에는 판자들을 엮어 만든 엉성한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다리들은 큰 물이라도 나면 어김없이 떠내려갔다.


얼른 들으면 매우 목가적인 학교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건 어쩌다 돌아오는 주말의 이야기이고, 평소에는 국민학교 5학년이 주는 엄청난 압박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특히 1979년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저 목가적 풍경은 1년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아파트 촌으로 바뀌어 갔고, 서울 전역에서 전학생들이 몰려왔다.


날마다 전학생이 들어오다 보니 학급당 인원이 90명을 넘겨버렸다. 내가 퇴직하던 해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한 학년이 교실 하나에 다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전학 온 아이들은 죄다 중상류층 집 아이들이었고, 하나같이 공부를 잘했다. 그러니 1등은 언감생심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강북에선 전교 1등도 했던 내가 반에서 10등 안에 들어가는 것도 간당간당 하자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나를 앉혀놓고 중학교 상위 수준의 영어와 수학을 공부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어려운 문제가 많기로 악명 높았던 ‘마스터 중학 수학’이라는 무시무시한 책에 붙들려야 했고, ‘성문 기본 영어’라는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책을 공부해야 했고, 매일 아침마다 영어 테이프를 한 시간씩 들어야 했다.


더 큰 비극은 1등을 회복할 때까지 피아노 연주 금지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정우와 어울리면서 음악을 즐기게 된 나는 예전과 달리 피아노도 과제 연습하듯 치지 않고 즐기면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피아노를 즐기다 보니 무대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도취되기도 했고 몸을 흔들기도 했는데 이걸 본 어머니 눈 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덤벙거려 100점 맞을 시험도 실수로 틀린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피아노에 도취되어 몸을 흔들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공부, 엄밀히 말해 시험점수에 방해되는 요인은 무조건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겼다. 심지어 아들과 같이 살겠다는 시아버지조차 공부에 방해된다며 시골로 쫓아 보냈다.

그런 어머니가 피아노를 공부의 적으로 선언했다. 결과는 뻔했다. 피아노는 부엌 뒤의 창고 같은 골방으로 추방당했다.


레코드 판들, 그리고 정우와 함께 녹음한 수많은 카세트 테이프 들도 같은 운명이 될 뻔했다. 나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클래식을 들으면 두뇌가 좋아지고 학습 효율이 높아진다.”라는 신문 기사를 들이 밀며 버텼다. 나의 간절한 호소가 먹혀 들었고, 덕분에 그것들은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신문기사의 유탄을 엉뚱하게 아버지와 동생들이 맞았다. 어머니는 공부에 도움이 되는 클래식 음악 외에는 어떤 음악도 집안에서 들려서는 안 된다는 조칙을 공포했다. 그 결과 텔레비전의 가요 프로그램이나 쇼 프로그램 시청이 금지되었고, 오직 교양프로그램, EBS, 그리고 9시 뉴스만 시청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피아노 연주의 황홀경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식구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마다 살금살금 골방으로 들어가, 행여 식구들 깨울까 약음기를 걸쳐놓고 아주 미세한 터치로 피아노를 쳤다. 그렇게 몰래 몰래 모차르트 소나타를 한 곡 두 곡 익혀나갔다.

나 같은 보통 학생이 제대로 된 레슨 없이 모차르트 소나타를 자습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다만 모차르트가 베토벤이나 쇼팽에 비해 악보가 단순하고 읽기 쉬워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싶어 매달려 봤을 뿐이었다.

정우네가 가까이에 살았다면 지도를 받아가며 피아노를 칠 수 있었겠지만 이사 오고 난 뒤 정우를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도곡동에서 잠실이 뭐 그리 머냐 하겠지만, 지하철도 없고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일단 이사 가고 전학 가면 친구랑 연락 끊어지는 게 너무 당연했다.


몰래 피아노를 칠 때 마다 머리 속에서 정우가 뛰어다녔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마 신천국민학교 잘 다니고 있겠지. 뭐 하고 있을까? 누나가 다니고 있는 예술 중학교 입학 준비하고 있겠지.


“이보세요, 증인. 아까 경고했는데, 또 자서전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권오석이란 사회 선생, 아니 역사 선생이었나?”

“역사도 가르치는 사회 선생입니다.”

“뭐든 간에 하여간 그 사람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디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야기나 빨리 하세요.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막 나오려던 참이었습니다. 시간 아깝게 자꾸 끊지 마세요.”


나는 맥이 끊기는 바람에 혼란스러워진 기억 창고를 더듬었다.

언제였더라? 아, 국민학교 6학년 때 일이다. 한창 여름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양재천에서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괴롭히며 더위를 식히다 귀가 시간이 빠듯해져 허겁지겁 집으로 달렸다.

물놀이 덕분에 시원해진 느낌을 달려가느라 모조리 상쇄시키고 온 몸이 땀에 푹 젖는 지경이 되어 간신히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눈을 크게 치켜 뜨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에 든 것을 나를 향해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눈을 감고 달게 매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매가 아니라 신문을 들이밀었다.

“얘, 오석아. 이거 좀 봐라. 정우가 신문에 다 났네?”

“네? 어디요?”

나는 정우 소식이 있다는 말에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가 내민 신문지를 빼앗듯이 움켜 쥐었다.

그 기사는 대한 신문에서 자사가 주최한 음악 콩쿠르의 결과와 입상자 면면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그런데 그 기사에 바로 정우 이름이 나와 있었다.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기사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변이 속출한 대한음악 콩쿠르 – 피아노, 바이올린 부문을 모두 국민학생이 휩쓸어

1980년 6월 27일 막을 내린 본보 주최 대한음악콩쿠르에서 어린 학생들이 어른들을 물리치고 입상하여 화제다. 피아노부에서는 권정우 군(12)이 일반부 2위에 올라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권정우 군은 지난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3위에 올라 국위를 선양한 권미우 양(15)의 친동생으로 밝혀져 누나에 이어 또 다시 국위를 선양할 인재로 기대감을 불러 모았다.

진짜 이변은 바이올린 부에서 일어났다. 역시 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인 강소정 양(12)이 대학생과 대학 졸업생들을 모두 물리치고 영예의 대상을 차지하여 대회 주최측과 심사위원단을 경악시킨 것이다. 강소정 양은 현재 파리 콘서바토리에 입학할 예정으로, 본격적인 세계 무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대한음악콩쿠르 대상 수상자 강소정 양


정우가 각종 콩쿠르를 휩쓸고 다니는 것이야 4학년 때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4학년이 6학년 형, 누나들 다 이기고 최고상을 받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 다 건너뛰고 어른들 나가는 일반부에서 2등을? 미우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것도 처음 알았다. 내가 그런 남매와 친분을 맺었었다는 사실이 공연히 자랑스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이때 내 눈길을 더 잡아 끈 것은 정우 보다도 바이올린 부에서 어른들을 모두 물리치고 대상을 차지했다는 강소정의 사진이었다. 마침 어머니도 그게 생각났는지 다시 신문을 꼼꼼히 새겨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사진을 보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얘는 인물이 참 못났다. 안 그러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어머니와 나는 여자 보는 눈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참 못났다고 한 ‘대한민국 음악 콩쿠르 대상을 수상한 강소정 양(12)’이라는 캡션 위에 우뚝 서 있는 소녀 사진을 보고 나는 한 동안 넋을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사진 속의 강소정은 바이올린을 세워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흑백 사진이라 그런지 눈이 얼굴의 1/3쯤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커 보였고, 눈동자의 선명한 검정빛이 나를 뚫고 지나갈 듯 강렬하게 반짝였다.

그날 밤, 나는 강소정이 출연한 꿈을 꾸었다. 강소정이 정우의 피아노에 맞춰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예전에 정우네 집에서 들었던 미우의 연주와 비슷했다. 그때부터 나는 강소정의 팬 질을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지네트 빠’ 로 남아있다.


이후 어머니는 심심치 않게 어디선가 정우 소식을 물고 왔다. 어머니 속셈이야 정우가 잘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나와 동생들의 분발을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보고 싶은 정우의 소식이라도 듣게 되어 그 시간이 좋았다.

“정우가 글쎄 외국에 나갔단다.”

아니 외국 나가는 게 무슨 이야기 거리냐고 이렇게 말했을까 싶겠지만 그 시절에는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출세의 상징과 같았다. 군사독재정권이 다스리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외국 소식, 외국 실태를 알면 알수록 독재를 정당화하기 어렵고, 부풀어 오르는 자유에의 열망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은 해외여행을 철저히 차단했다.

요즘 같으면 어린이조차 가지고 있는 여권이 당시에는 특권층의 상징이었다. 회사 업무나 기타 공무가 아니라면 외국에 살고 있는 친지들의 초청장 없이는 여권 발급이 불가했고, 그나마 한번 쓰고 버리는 단수 여권이었다.

그러니 어머니에게 정우가 외국에 나다닌다는 이야기는 정우가 특권층의 반열에 올라갔다는 것처럼 느껴졌음에 틀림없었다.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나한테 쏟아져 내렸다.

“자, 봐라. 정우는 저렇게 외국에도 다닌다. 너는 뭐 할래? 아니다. 아니야. 영어 공부 이 정도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다.”

어머니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나의 영어 테이프 듣는 시간은 두 배로 늘어났고, 매일 잠자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영어 동화 암송을 하나씩 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까지 추가되었다.


나는 그때 어머니가 나한테 가했던 영어 맹폭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영어 학원 한 번 안 다녔고, 외국 생활도 한 적 없지만 영어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갑갑한 국민학교 5, 6 학년을 보냈다. 졸업식 때 한 반에 여덟 명 주는 학업 우등상도 받지 못해 부모님으로부터 그 흔한 “졸업 축하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우등상도 못 받은 녀석.”이 축하 인사를 대신했다.

“네. 그렇게 국민 학교를 졸업했군요.”

재판관이 체념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중학교로 넘어가겠네요?”

“당연하죠.”

“디누는 나오나요?”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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