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기의 미학, 사는 건 힘 빼기

by 공감의 기술

수영장에 초보자 코스를 등록했습니다. 초급반에 늘씬한 수영 강사가 강습을 합니다. 두 번째 스무 살을 한참 넘긴 적지 않은 나이지만 수영을 열심히 배워 탄탄한 몸매를 가져보고 싶었습니다.

난생처음 헤엄치는 법을 배우니 잘할 턱이 없습니다. 납작한 수영판을 잡고 물에 뜨는 연습부터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하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물에 뜨지질 않습니다.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른쪽으로 쏠립니다. 왼쪽으로 몸을 틀려고 발버둥 치다 그대로 한 바퀴 돌아 물속 깊이 처박힙니다.

헤엄은 고사하고 물만 마시는 나를 보며 강사가 한 마디 합니다.

"몸에 힘을 빼세요.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면 물에 안 떠요."

힘을 빼라는 말에 힘을 뺀다고 뺐는데도 1달 내내 같은 말만 들었습니다. 대체 힘을 빼는 게 뭔지. 힘을 뺀다는 말은 쉬운데 몸은 도무지 따라주지 않습니다.




힘 빼기가 필요한 사람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밋밋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며 드럼을 배우는 친구가 있어요. 한날은 녀석이 투덜댑니다. 혼자서 양손을 드럼 치듯 흔들고 손목 스냅을 돌리며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드럼을 배웠는데 맨날 야단 듣는다.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다며 힘 좀 빼란다. 이 놈의 손모가지는 이리 가느면서 왜 드럼만 치면 힘이 잔뜩 들어가는지. 힘 빼는 게 어렵다."


골프를 시작합니다. 골프채를 바르게 잡고 스윙을 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머릿속에는 드라이브 샷을 멋지게 날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만 실제는 뒤땅을 치고 공은 왼쪽으로 훅 가거나 오른쪽으로 휙 꺾입니다. 제대로 맞히지도 못하는 걸 보며 골프 강사가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어깨 힘 좀 빼세요."

골프를 배우면 처음 몇 년 동안 끊임없이 듣는 소리입니다. 힘을 빼는 데만 몇 년이 걸립니다.


프로야구 경기를 시청합니다. 프로야구이니까 대한민국에서 야구에 관한 한 날고 기는 선수들만 모였습니다. 밥만 먹고 자나 깨나 야구만 한 투수가 던지고 타자가 칩니다. 아나운서가 신나게 중계를 하고 해설자가 해설을 합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는 멘트가 있습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어요. 저래 가지고는 좋은 타격이 안 돼요. 힘 빼야 돼요."




비단 운동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도 힘 빼기의 기술은 필요합니다.

신입사원이라는 명목 하에 강요되는 열정은 일만 불러옵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처리하느라 주말을 반납하고 야근을 밥먹듯이 해도 일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아직 젊기에 뭐든 하나라도 더 배워 이루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러다간 내 몸과 마음만 지칩니다. 열정 페이가 될 뿐이죠. 느긋한 힘 빼기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힘을 안 들인다는 뜻을 노력도 하지 않고 요행만 바란다고 오해합니다. 힘을 뺀다는 것은 우선순위를 정하고 가장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는 요령입니다. 루틴처럼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적절하게 강약을 조절하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관계에서도 빼기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만나고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거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사람은 소설에서나 나오는 캐릭터입니다. 현실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상사, 부하직원, 동료들 심지어 가족들까지. 저마다의 사고방식이 있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에 나름대로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그 성격을 일일이 다 맞춘다는 건 나만의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내 캐릭터는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관계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와 맞는 사람을 옆에 두고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이 더 낫습니다. 이래저래 맞지 않는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훨씬 덜할 거예요.


일상에서도 빼기의 기술은 삶을 여유롭게 만듭니다. 잘 빼기만 해도 사는 게 수월합니다.

TV선, 인터넷선, 전기선, 케이블선, 충전기선. 각종 선들이 뒤엉켜 있을 때는 선을 하나씩 빼야 하듯이

집안일, 직장일, 사람 관계일 등등 온갖 걱정이 뒤엉켜 있을 때도 걱정을 하나씩 빼야 합니다.

이 순간에도 하는 쓸데없는 걱정 빼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빼기,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조급함 빼기, 떠오르기만 해도 화가 나는 미운 감정 빼기, 섭섭함, 분노, 후회도 빼기, 남이 해줄 거라는 기대 빼기, 알아서 척척 다 됐을 거라는 착각 빼기, 나 아니면 일이 안 돌아갈 거라는 망상 빼기.

이렇게 빼내기만 해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온몸이 뻣뻣해져서 제대로 된 기술을 구사할 수 없습니다. 운동하려면 힘부터 빼야 하고요.

생각이 많다는 건 머릿속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거죠. 생각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정리가 안됩니다. 머리를 비워야 머리가 돌아갑니다.

관계에 힘이 들어간다는 건 관계에 집착하지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집착이 원하지 않은 부메랑으로 날아와 상처 받기도 하니까요. 집착했던 마음을 빼는 것만으로 답답했던 관계가 숨통이 트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온갖 글씨가 적혀 있어도 여백이 없다면 뻑뻑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네모난 집안을 들여다보면 빈 공간이 우리가 지내는 장소입니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 일상에서 여백을 두어야 여유가 생기고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산다는 건 빼기의 미학, 힘 빼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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