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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Feb 27. 2024

무주 라제통문, 일제 수탈 역사 간직한 아름다운 길



<라제통문> 하면 막연히 '신라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신라를 나타내는 '라(羅)'와 백제를 나타내는 '제(濟)'를 따서 '신라와 백제 간을 통과하는 문'이란 의미를 그 이름 안에 담고 있는 만큼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문이 생겨난 시기부터가 신라 백제시대와는 거진 1천 년이나 되는 세월을 격한 1900년대 중반 일제 강점기였고, <라제통문>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건 다시 그로부터 몇십 년의 세월이 더 지난 1950년 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때문에 이 문이 신라 백제 시대부터 있어왔을 거라 오해하고 있었다면 이제 그만 오해를 푸시라고 얘기하고 싶다.​​



다만 라제통문 인근에는 신라와 백제 간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쌓이고 쌓인 나머지 파리떼가 몰려들어 '파리소'란 이름이 붙은 연못이 있고, 이때 죽은 병사들이 묻힌 걸로 추정되는 300여 기의 무덤도 있는 만큼 신라 백제의 역사와 적잖은 연관성을 가진 장소라는 건 사실이다. 연관성은 있으되 신라 백제 백성들이 이 문을 넘나들었을 거란 사극 속 한 장면 같은 상상은 금물일뿐.​​


백제 땅이었던 전북 무주 설천면과 옛 신라 땅이었던 무풍면 경계에 위치한 이 라제통문이 있는 지역은 굴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양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넘어다니던 고갯길 정도만 있었다고 전해진다. 처음 굴이 뚫렸을 당시엔 인근 마을 이름을 따 '기니미굴'로 불렸었는데, 1950년경 안성면장이었던 김철수 옹이란 분이 무주군 향토지인 <적성지>에 '라제통문'으로 불러야 한다는 글을 게재한 뒤 본격적으로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단다.​​​



설천면 쪽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이 라제통문은 일제 강점기 금광 개발을 위해 뚫었다고 설명돼 있으나, 그보다는 일본인들이 전북 무주와 경북 김천, 거창을 잇는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를 새로 만듦으로써 인근 금광에서 채굴한 금이나 수탈한 농산물을 보다 수월하게 실어나르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제 강점기 무렵 각종 건축이나 도로 공사들이 중장비보다는 대개 사람들의 육체노동력에 기반해 행해졌음을 고려하면 적잖은 이 지역 주민들이 바위산을 뚫어 신작로를 만드는 고된 노동에 동원됐을 걸로 추정되며, 이후 이 신작로를 통해 더 편하고 빠르게 각종 수탈이 이뤄졌을 테니 그걸 고스란히 당하고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아픈 속은 속이 아니었을 거였다.​​



요약하면 무려 1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격해 아주아주 나중에 만들어진 신작로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백제 경계를 관통하는 굴 어쩌구 하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설명에 혹해 혹시라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두리뭉실 넘어가는 일은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 되시겠다. 오랜 세월 적대적 관계를 가져온 두 나라 역사를 감안했을 때 이웃집 넘나들 듯 백성들이 쉽게 오갔을 거라는 낭만적 상상 역시 금물.​​


신라와 백제 간 국경을 넘나드는 문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클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실제로 가보면 라제통문은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작은 돌산 한 가운데를 뻥 뚫어 통로를 만든 형태인데, 육안으로 대략 짐작하기엔 통로라고 해봐야 국보 1호 남대문보다도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다.



통로 폭 역시 그리 넓지는 않아서 편도 1차로보다 약간 넓은 수준이다. 양 방향에서 오가는 차들이 있을 경우 한쪽은 반드시 멈춰서서 기다렸다가 순서를 기다려 지나가야 하는 일방통행 구조여서 자칫 차들이 많이 몰리는 관광시즌에 잘못 찾아갔다간 적잖이 교통정체에 시달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대한민국 어딜 가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데다가, 몇 걸음만 걸으면 신라와 백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손꼽히며 인증샷 한 장 남기려는 여행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무주 여행길에 혹시 이 라제통문을 지날 일이 있으면 아름다운 길을 즐기되 현실적으로 있지도 않았던 신라 백제 간 관문 어쩌구 하는 허구보다는 일제 수탈의 역사가 깃들어있는 유적이라는 사실을 한번쯤 머리에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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