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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대신 읽어야 하는 날

by 콩지

오늘은 쓰는 대신 읽어야 하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장소를 옮겨가며 책을 읽었다. 읽기만 하다 자려고 커피도 꾹 참았는데, 생각보다 오늘 하루가 길다. 오늘은 내가 글을 읽는 장소에 대해서 괜히 적어 본다.



집|

의자가 꽤 딱딱한데 내 몸에 꼭 맞아서 벌써 5년째 쓰고 있다. 이 의자에 앉아서 책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 넘기며 최대한 바른 자세로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마음이 녹아드는 문장을 만나면 옆에 있는 침대로 자리를 옮긴다. 목이 굳지 않을 자세로 누워야 하기 때문에 양 손으로 책을 번쩍 들어서 본다. 안경이 필수다. 천장으로 양 손을 뻗은 상태로 책을 들어 읽다 보면 금방 어깨와 팔이 아프다. 그럼 잠시 엎드린다. 어깨를 최대한 내리고 뒷목의 힘을 뺀 채로 읽다가 더 읽히지 않으면 책을 침대 구석으로 밀어 놓고 잠이 든다. 책을 읽다 잠이 드는 싱거운 하루가 요즘 참 그립다.


교보문고|

읽고 싶은 책이 딱히 없는 날 향한다. 코로나로 인해 도서관이 문을 닫은 이후로 교보문고가 나에겐 도서관이 되었다. 결제할 때 빼고는 나는 거의 도서관에 온 듯 행동한다. 요즘 교보문고는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입장이 되지 않는다. 마스크를 쓰고 책을 읽는다는 게 무척 답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표현에 더 적극적으로 변한 나를 발견한다. 놀라울 땐 아래턱을 살짝 떨어뜨리고 작게 '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웃길 땐 피식피식 코웃음도 친다. 시선 집중이 무서운 나로서는 늘 사람이 많은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책을 읽으며 리액션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요즘은 마스크 덕분에 조금 자유롭다.


스틸 북스|

한남에 위치한 이 서점을 굉장히 사랑한다. 일단 카테고리별로 분류가 참 잘 되어있고, 요리와 운동에 관한 책이 다양하다.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책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를 활용한 레시피가 담긴 책, 요가책이지만 동작이나 운동 자체에 대한 안내는 쏙 빼고 요가를 하는 작가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만 쓴 책도 있다. 나는 그런 불친절하고 개인적인 책이 좋다. 채식에 관련된 책, 예술과 돈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에 대한 책, 마케팅에 대한 책도 좋아한다. 이곳에서는 훑어보듯 읽다가 맘에 드는 책을 구매한 후 집에서 마저 읽는다.


모모|

한남에 모모라는 카페를 좋아한다. 이유는 레몬&진저 티에 진짜 레몬을 넣어주기 때문이다. 단골이 된 지 오래인데 레몬&진저 티 말고 다른 거는 마셔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다 보면 눈이 뻐근하게 아프다. 밤에는 Bar로도 운영을 하는 곳이라 전체적으로 어둡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이 좋다. 레몬이 정말 정말 두껍다.


호텔&모든 낯선 방|

낯선 곳에서는 잠을 자지 못한다. 희한하다. 21살 때부터 배낭여행을 하면서 16인실 8달러짜리 방에서도 자고, 제주도에서는 혼숙 게스트 하우스에서도 자봤다. 도마뱀이 스스슥 기어가는 소리가 나던 라오스에서도, 말라리아 예방 주사를 맞지 않고 간 태국에서도 모기장 없이 잘만 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방이 아닌 다른 모든 곳에서 잠을 설친다. 이땐 정말 별 수 없이 책을 읽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재밌는 책을 골라가야 한다. 덕분에 모든 여행 전에 중고 책방인 알라딘에 가서 좋아하는 작가의 옛날 책이나 읽지 못한 책을 사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 됐다. 잠과 맞바꿀만한 책이어야 하기 때문에 나름 신중하게 고른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매일 책을 읽는 사람 같지만 나는 책을 아주 가끔 읽는 사람이다. 매일 보는 영화에 비하면 책 읽기는 취미 축에도 끼지 못한다.

프리랜서의 일상은 지루해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자, 어떻게든 생산적인 활동을 찾아내는 발버둥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날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온전히 기댈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책에 오래 기댔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이 작가의 어떤 고난과 시간을 통과하고 나온 글인지 잘 알 순 없지만, 쉽지 않은 순간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쉽지 않은 순간들을 이겨내고 글로 옮겨준, 그래서 오늘 나를 위로해준

쓰고, 출판하고, 판매하는 책에 관련한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 오래 글에 기댔다. 결국은 ‘아, 연애하고 싶다!’로 마무리되는 하루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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