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기억해내야만 내일(월요일)을 살아낼 수 있겠다.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내는걸로는 불충분하다. 물을 줘야겠다. 자랄 수 있게. 내 기둥이 될 수 있게. 그렇게 난 내 10개의 기둥을 되새겼다.
1.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유튜브 뮤직이나 멜론 구독을 멈춘 지 오래다. 사운드클라우드를 이용하곤 하지만, 원하는 노래가 없을 때가 많아 결국 음악을 아예 안 듣기도 한다. 그렇게 그냥 저냥 살던 어느 날, 내 취향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북카페에서 깨달았다. 나, 음악을 좋아했었지. 재즈는 모르지만 챗 베이커의 음울한 무드를 좋아했고, 힙합은 모르지만 텐타시온의 고독을 좋아했다. 피아노나 기타를 다룰 줄은 모르지만, 루스 비(Ruth B)의 음악처럼 미니멀한 피아노나 기타 소리와 여백이 느껴지는 음악을 좋아했다.
2.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넷플릭스를 보지 않은 지 오래다. 남들이 다 재밌다고 한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웃어라, 여기에서 감동 받아라 하는 인위성이 맘에 들지 않았고, 웃기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소년의 시간’이라는 4부작 드라마에서, 뭐라 말하기 힘든 먹먹함을 느꼈다. 신박한 롱테이크 기법과 시사성, 그리고 사회를 담아내는 감독만의 시각, 그 3박자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런 정교하고 섬세한,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생각하게 만드는 영상을 좋아하는구나, 깨달았다.
3. 책은 한동안 철학과 심리학 책만 읽다가, 왠지 모를 지루함에 빠져 있던 찰나, 시각장애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 책의 재미를 느꼈다. 나는 늘 소외된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걸 좋아했던 거다.
4. 전시회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는데, 최근에 우연히 카페와 함께 운영하는 전시회에 갔다. 폴란드 포스터 전시였는데, 예전에 폴란드를 갔던 기억이 살아나면서 맞아, 나는 여행도 전시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옷도 코로나 이후 돈 아낀다고 사지 않았는데,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코디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올드머니룩이나 핀터레스트 코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향수도 마찬가지.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그런 향이 좋다. 지금 최애는 대니얼트루스의 밤쉘인데 지속력이 아쉬워서 유목 중이다. 자라 향수를 눈여겨 보고 있다.
6.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며, ‘그래, 나는 이 몸이 노근노근해지는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싶었다. 안마의자도 좋아하지만, 그건 회사에서 해야지.
7. 아샷추나 무알콜 캔맥주 레몬 맛, 칼로리가 신경 쓰이지만 맛있다. 아아도 집에서 먹는 것보다, 밖에서 파는 게 이상하게 맛있다.
8. 예쁜 카페, 예쁜 공간이 좋다. 인스타 감성이나 사람 많은 곳보다는, 한적하고 깔끔한 그런 곳이 좋다. 나무와 자연 그런 것들도 필수다.
9. 친구들과 서로의 인생과 연애, 그런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좋다. 스몰토크 말고, 조금은 진지한, 비밀 이야기 같은 것들.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된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순간들.
10. 새로운 운동과 취미를 좋아한다. 풋살, 수영, 플라잉요가, 스쿼시, 필라테스, 헬스, 폴댄스, 스피닝, 자전거, 클라이밍… 그리고 또 뭐 하지? 뮤지컬, 영화 평론, 독서 모임, 작곡, 경제 스터디… 그리고 또 뭐 하지?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비용이 든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기쁘게 한다면, 그 기쁨을 위해 나는 어느 정도는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우울이 찾아오기 전에, 이 작은 기쁨들이 나를 지탱해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금씩,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에 물을 주기로 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잃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