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하자면 낯선 관광지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가려 하는데, 주변 식당의 사장님들이 몰려와 우리의 옷자락을 붙들고 당기는 실정이다. 무엇을 먹을지 정하지 못한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린다. 우리의 몸은 고깃집 사장님이 당기면 고깃집으로, 백반집 사장님이 당기면 백반집으로, 일식집 사장님이 당기면 일식집으로, 양식집 사장님이 당기면 양식집으로 기운다. 주변을 둘러싼 식당 사장님들은 각자 자기네 가게에 오라며 옷자락을 끌어당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댄다.
삶의 방향성은 설정하기가 참 어렵다. 삶이라는 미지의 영역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내 삶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가. 나는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하는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파생되는 의문들이다. 그러나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다양성이 공존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몰이해에 빠져 갈등과 다툼으로 치닫는 사례를 우리는 쉽게 접한다.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 사는 개인이 삶의 방향성을 제대로 설정하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삶의 방향성을 확립하지 못한 우리는 주변에서 들리는 말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열심히 자기 계발하고 악착같이 노력하며 살아야 해.”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 최고야!” “돈이 뭐가 중요해? 돈 버느라 애쓰지 말고 지금을 즐겨.”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이 부재한 탓에, 우리는 주변의 말만 듣고 열심히 살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흥청망청 노는 데 시간을 쏟는다. 마치 우리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식당 사장님들이 당기는 쪽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이끌리는 꼴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몰라 허둥댄다.
이른바 방향성을 잃어버린 시대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방향성을 설정하게 해주는 나침반에 대한 요구가 절실하다. 삶에서 자신만의 방향성을 확립한 사람은 다양한 가치관의 역학 관계 속에서도 스스로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중심을 잡은 이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삶의 방향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고전(古典), 흔히 인문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이다.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의 정의는 어려워
고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을 살펴보자.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읽는 플라톤(Platon)의 『국가』는 고전인가? 고전이다. 철학자 중 처음으로 ‘존재’를 새롭게 문제 삼은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은 고전인가? 고전이다. 현대에 무인도 모티프를 활용한 콘텐츠들의 원천인 디포(D. Defoe)의 『로빈슨 크루소』는 고전인가? 고전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읽히는 책이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롭게 탐구한 책이나, 현대의 많은 콘텐츠들의 원천이 되는 책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고전에는 시간적인 개념과 가치적인 개념이 혼재한다. 그래서 고전은 확실히 정의하기 어렵다. “고전은 ~다”의 형식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우리는 고전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모두 높은 지밀도(知密度)를 가진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밀도. 이것은 한 권의 책이 내포하는 지식의 밀도를 의미한다. 고전의 지밀도는 일반 서적들의 지밀도에 비해 월등히 높다. 달리 말해 고전 한 권이 내포하는 지식의 압축성이 매우 크다. 고전 한 권에 들어있는 지식의 양과 일반 서적 한 권에 들어있는 지식의 양을 비교해 보면, 고전이 끌어안은 지식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같은 300쪽의 책이라도 고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총량이 일반 서적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총량을 압도하는 것이다.
설명을 위해 다시 한번 플라톤의 『국가』를 빌려와 보자.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하고 싶은 바는 간결하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중요하다.” 많은 이들에게 플라톤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그걸 누가 몰라?” 누구는 볼멘소리를 흘리기도 한다. 그런데 고전에서 이처럼 당연한 생각이 결론으로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은 굉장히 복잡하다. 『국가』라는 고전은 당연한 생각 하나를 끄집어내기 위해 ‘가치’란 무엇인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중요하다’는 단어의 실상은 무엇인지, 보이는 가치를 우선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등의 지식을 총동원한다. 그래야만 고전이 도출하는 결론의 설득력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고전은 한 가지 결론을 내놓기 위해 복잡하고도 정교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고전의 지밀도는 이런 식으로 촘촘해진다. 고전에서 도출된 결론이 일반 서적에 비해 유달리 독창적이지도 않고 특별히 창의적이지도 않지만,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 동반되는 지식의 총량은 일반 서적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같은 300쪽의 분량 속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지식을 내포해야 하니 고전의 지밀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고전 한 권은 일반 서적 열 권과 맞먹는 지식을 내재한다.
높은 지밀도는 일반 서적과 구별되는 고전만의 뚜렷한 특징이다. 그리고 높은 지밀도에 고전의 고유한 가치가 근거한다. 고전은 지밀도가 높은 책이기에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찾아 읽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롭게 탐구해 풀어내는 힘을 가지며, 현대의 많은 콘텐츠들의 원천으로 자리한다. 이렇게 고전은 엄청난 책이다.
높은 지밀도는 고전의 매력적인 측면 중 하나다. 동시에 독자들이 고전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기도 하다. 나무가 빽빽한 숲은 돌파하기 힘든 법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식이 빽빽한 고전도 독파하기가 만만치 않다. 지밀도가 높은 책을 독파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신력과 집중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고전의 지밀도를 고려하면 고전 읽기가 일반 서적을 읽는 것에 비해 몇 배나 더 힘든 것이 정상이다.
고행을 자처하는 이유는
원성이 터져 나온다.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읽기도 힘들고 완독하는 데 시간도 오래 소요되는 고전을 꼭 읽어야 하나?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다른 방법도 많을 것이다. 심지어 그 방법들은 고전 읽기에 비해 쉽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 고전의 지식이 중요하다면, 고전이 압축한 지식을 유쾌하게 풀어낸 인문학 서적과 강의가 도처에 얼마나 많은가!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고행을 자처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결국 왜 하필 고전인가?
흔히들 고전을 읽는 이유는 고전의 내용을 암기하기 위해서라고 오해한다. 이런 까닭에 고전을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플라톤 왈 이러쿵저러쿵” 식의 지식을 자랑스레 뽐낸다. 그런데 고전 읽기의 목적은 고전 속의 지식을 암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도리어 고전 읽기의 본래 목적은 한 가지 지식을 도출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탐구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높은 지밀도를 구성하는 빽빽한 지식의 틈새로 진입해야 한다.
고전 읽기의 목적은 지식 암기가 아닌 과정 탐구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플라톤의 『국가』에서 말하는 결론은 이것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단지 “보이지 않는 가치가 중요하다”는 결론만을 접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라면 굳이 『국가』를 읽을 필요는 없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인문학 서적과 강의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하지만 초점은 결론보다는 과정에 맞춰져야 한다. 고전 읽기는 한 가지 지식이 도출되는 힘겨운 과정을 고스란히 그리고 차근차근 따라가는 일이다. 이 과정 속에서 독자가 마주치는 낯선 개념과 난해한 서술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지식이 빽빽한 고전을 풀어헤치는 독자의 뇌는 고전의 지밀도를 뚫으려고 애쓰며 절규한다. 그러나 과정을 따라가면서 뇌에 새겨지는 고통은 의미 있는 고통이다. 이 고통으로 인해 우리의 머릿속에는 보이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이 점차 확고히 자리 잡는다. 보이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을 외워서 저장하는 일과 이해해서 체화하는 일은 이 지점에서 갈린다. 전자가 지식을 암기하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지식을 가치관으로 내면화하는 작업이다. 단기간에 암기한 지식은 쉽게 휘발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이해한 과정은 뇌리에 깊게 박힌다. 고전을 탐독하며 독자가 겪는 고통은, 그로 하여금 고전이 표출하는 지식을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내면화하도록 유도하는 감각이다. 고전의 지식이 독자의 가치관으로 승화하는 순간이다. 고전의 한 가지 지식을 도출하는 과정을 따라감으로써 독자는 비로소 자신만의 가치관을 구축하게 된다.
“1+1=2” 너무나 당연한 진리다. “1+1=3”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진리인 “1+1=2”의 증명은 매우 복잡하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페아노 공리계(Peano axioms)를 이용해 비교적 간단한 증명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1+1=2”라는 당연한 수식에는 복잡한 증명 과정이 덧붙는다. 이와 같이 고전도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을 복잡한 증명 과정을 동반해 밝혀낸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은 고전이 행한 기나긴 증명 과정 덕에 당연한 생각으로 굳어진지도 모른다. 관건은 이렇게 당연한 생각이 삶의 가치관으로 체화되는가다. 보이지 않은 가치의 중요성을 당연시하는 많은 사람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보이는 가치를 좇는 경우가 흔하다. 고전 읽기는 독자가 겪는 이러한 자기모순을 극복하는 활동이다. 이는 당연한 생각과 진실한 마음의 일체화를 가능케 만든다.
더불어 읽기 힘든 고전을 읽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사고에는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사고의 탄력성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힘이라고도 부른다. 나무가 빽빽한 숲을 돌파하면서 다리의 근력이 강화되는 것과 같이, 지식이 빽빽한 고전을 독파하면서 사고의 탄력성이 강화된다. 즉 고전을 읽으면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 생각하는 힘을 기른 사람은 곧 자신만의 가치관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다. 이는 편협한 고집이나 독단적인 아집과는 다른 차원의 단단함이다. 오히려 고전을 통해 내면화한 가치관은 견고한 주체성을 표방한다. 주변의 어지러운 말들에 휘둘리던 사람이 자신만의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단단한 가치관과 견고한 주체성은 우리에게 프레임을 선사한다. 고전 읽기로 함양한 자신만의 가치관과 생각하는 힘이, 우리가 살면서 접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해석하는 도구인 프레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프레임을 갖지 못한 사람은 삶에서 만나는 사건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혹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해석해 내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그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폐 속으로 무자비하게 침투하는 왜곡된 사실과 조작된 정보를 곧이곧대로 수용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스스로 해석할 능력이 없으니 타인이 은밀하게 강요하는 해석을 따르는 것 외에는 어떤 자세도 취할 수 없다. 반대로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외부에서 가해진 해석에 대항하는 저항력을 갖춘다. 그에게는 눈앞에 펼쳐진 사건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 삶 속에서 대면하는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을 해석할 수 있기에,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정확히 판단한다. 그는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적다. 그의 판단력 그리고 결단력은 그의 삶을 보다 명료하게 한다.
한마디로 고전 읽기를 통해 마침내 삶의 방향성이 설정된다. 삶의 방향성을 설정한 영혼은 선명한 색채를 띤다. 무미건조한 무채색의 영혼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탑재하면서 그의 색채는 뚜렷해진다. 그는 고전의 지식을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체화했고, 그 가치관을 더욱 단단하게 단련해 주체적인 자로 변모했으며, 삶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고전이라는 나침반으로 삶의 방향성을 설정한 결과다.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
일단 무작정 고전만 읽으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겠네! 이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밀도가 높은 고전을 읽음으로써 삶의 방향성이 설정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태도가 요구된다.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가 고전 읽기로 말미암아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의 성공 여부를 가른다는 말이다. 우리는 고전을 대할 때 인내와 적용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먼저 인내의 태도를 논하자면 이는 고전의 높은 난도에 인내하라는 말은 아니다. 고전은 원래 어려운 책이니 그저 인내하면서 읽으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고전의 결론 도출 과정을 따라가는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인문학 서적과 강의 등 어려운 고전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도구를 활용하려는 자세는 오히려 권장된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의 태도는 고전 읽기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전체적인 기간을 버티는 태도다.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일은 고전 읽기의 분명한 성과다. 그런데 고전을 읽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일은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전 읽기는 자격증 시험이나 외국어 능력 시험처럼 단기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분야가 아니다. 고전 읽기로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고전 읽기에 충실했어도 성과는 금방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또 그 성과는 수치화된 점수와 다르게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고전 읽기에 실망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지점도 이곳이다. 그들은 한 달 동안 열심히 고전을 읽었는데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툴툴거린다. 맞는 말이다. 고전 읽기는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내는 분야가 아니니까. 고전 읽기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려면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삶의 방향성은 다년의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윤곽이 잡히고 조금씩 구체화된다. 그 과정은 키가 자라는 과정처럼 다분히 점진적이다. 고전 읽기로 성과를 내기까지의 긴 시간을 버티는 인내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의 방향성이 빨리 설정되지 않는다고 애태우는 태도는 무익하다.
그럼에도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빨리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태도가 적용의 태도다. 인내의 태도와 더불어 적용의 태도가 병행된다면 고전 읽기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일은 보다 용이해진다. 적용의 태도는 고전을 읽고 이해한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고전을 읽고 이해한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는 태도는 고전과 현실의 접점을 확보하는 기점이다. 고전과 현실의 접점이 확보되는 순간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은 가속화된다. 삶의 방향성은 현실에서 유효한 바 고전이 현실과 접목된다면 고전은 삶의 방향성 설정에 직접적으로 조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전 읽기가 내용의 이해에 그친다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은 더디게 진행된다.
고전을 전문적으로 깊게 이해하는 태도는 학자들의 태도다. 고전을 읽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려는 우리는 고전을 다소 거칠게 이해하더라도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가령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가 보이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철학사적 의의만을 발굴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가치가 중요한데, 나는 과연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요시하며 살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는 지금 우리의 시대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고전을 읽고 이해한 내용을 현실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고전을 현실에 적용하는 태도가 습관화된다면 고전의 지밀도를 뚫고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은 성공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인내와 적용의 태도를 취할 때 삶의 방향성 설정을 위한 고전 읽기는 제대로 실행된다. 지밀도가 높은 책인 고전이 아무리 귀중한 가치를 내재한다 한들 우리가 적절한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 그 가치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고전의 가치는 적절한 태도와 만날 때 삶의 방향성을 설정해 주는 소중한 도구로 자리한다.
우리나라에도 고전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눈을 감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 Jobs)가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면서, 201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는 인문학 열풍이 불어닥쳤다. 자연스레 인문학의 핵심인 고전이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사회의 리더들은 글로벌 경쟁의 당락을 좌우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며 고전의 중요성을 꾸준히 제기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고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고전에 대한 관심이 곧 고전 읽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인문학 열풍 속에서 고전을 읽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사람들은 고전의 지식을 빠르게 흡수하기 위해 인문학 서적과 강의만을 찾았다. 고전은 자격증 시험이나 외국어 능력 시험처럼 스펙 중 하나로 치부되었다. 이는 지식 암기가 아닌 과정 탐구가 더 중요한 고전의 특성에 완전히 어긋나는 현상이었다.
그 결과, 10년 동안 인문학 열풍이 불었음에도 결국 우리 사회는 인문학적 소양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정작 중요한 고전 읽기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탓이다. 이제 인문학 열풍은 식어 버렸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채용 프로세스까지 개편했던 대기업들은 더 이상 인문학을 언급하지 않는다. 인문학 서적과 강의도 상당수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인문학적 소양 함양이 실패로 돌아가자 역설적이게도 비난의 화살은 고전을 향했다. 고전은 지나치게 어렵고 현실과 괴리된 콘텐츠라 쓸모없다는 주장이 쏟아진 것이다. 고전에 대한 불합리한 비난은 아직도 대세를 이룰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10년 동안 인문학 서적과 강의를 소비하는 대신 고전 읽기에 매진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고전 읽기로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작업은 곧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고전 읽기를 통한 자신만의 가치관 구축, 생각하는 힘의 증대, 세상을 해석하는 프레임의 발달은 모두 인문학적 소양에 속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소양은, 세상에 존재하는 천문학적인 양의 지식을 편집하고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고전 읽기가 곧 글로벌 경쟁력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고전 읽기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길러냈다면 우리 사회에는 이미 잡스와 같은 창의적인 리더가 등장했을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 고전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고전은 개인의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도구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인재를 육성하는 방법론으로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고전의 활용은 고전 읽기가 선행될 때만 가능하다. 고전을 직접 읽지 않는다면 삶의 방향성 설정도 인재의 육성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을 읽지 않는다면 고전은 우리 시대에서 살아 숨 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고전이 아니라 고물이다. 고전 읽기가 활성화될 때에야 우리는 가치 있는 고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고전 읽기는 우리의 영혼과 삶, 사회를 풍성하게 만든다.
자, 그렇다면 남은 궁금증은 이것이다. 우리의 영혼과 삶, 사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고전은 어떤 메시지를 품는가? 우리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읽어야 하는 고전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앞으로 소개하는 고전을 하나씩 만나 보면서 이 궁금증은 해소되리라.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고전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 고전 읽기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영혼의 색채를 선명하게 할 준비가 되었는가.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고전을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