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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Nov 10. 2021

여름나무와 가지치기

유은아~ 브로콜리도 먹어야 키가 크지.”

“응, 내가 브로콜리 얼마나 잘 먹는 데에. 나 마아아니 클 거야. 빨리 크고 싶어, 빨리! 이마안큼! 엄마는? 엄마도 크고 싶어?”

“엄마는 이제 다 컸지. 크고 싶어도 더 못 커.”

“엄마도 크고 싶은데 안 돼? 왜?”

“엄마는 이제 늙는 거야~ 크는 게 아니고.”


입에서 흘러나올 땐 아무렇지 않았던 말이 귀로 들어가자, 가슴이 덜컥했다. 늙는다는 단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단어가 주는 생경함을 소화하느라 밥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있는데, 유은이는 갑자기 식탁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소리쳤다.


“나는 빨리 크고 싶어! 크는 거 기다리는 게 너어무 길어. 빨리 엄마처럼 크고 싶은데.”


식탁 의자에서 일어서야만 엄마와 눈높이가 맞는 유은이는 당장이라도 키가 클 것처럼, 까치발을 들고 양팔을 쭉 뻗으며 표현했다.


“유은이는 왜 크고 싶은데?”

“응~ 빨리 커서 엄마처럼 되려고.”

“그렇구나, 왜 엄마처럼 되고 싶어?”

“엄마는 예쁘고, 뭐든지 다 잘 할 수 있잖아. 내가 똑똑 박사긴 한데, 아직 힘이 없어서. 우리 그럼 같이 결혼할까?”


다섯 살. 성장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가는 나이라는 걸 매일 아침 확인한다. 어제 아침엔 혼자서 티셔츠를 입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은 혼자 입을 때. 어젯밤 새롭게 알게 된 말 ‘코앞에 있다’ 를 오늘은 원래부터 알던 것처럼 활용할 때. 간식을 많이 먹었어도, 밥시간이 되면 다시 잘 먹을 때. 지금 너는 자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 많이 맞고 햇볕 쬐며 단단하게 자라나는 여름 나무처럼.


자신이 엄마처럼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는 아이의 말에, 문득 15년 후의 나를 상상해본다. 그때쯤에는 중년의 나이가 되는 걸까. 중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중년의 나는 이십 대의 유은이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지금보다 가까울까, 멀어질까.


“네가 지금 무슨 중년이야?”


며칠 전 남편에게 들었던 말이다. 아이 엄마들과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있을 때였다. 학교에서 직장으로 이어진 인간관계 경험이 있지만, 아이 엄마들의 세계는 또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물론 그사이에 육아로 인해 생긴 공백이 있기도 했다. 유은이가 자라난 5년의 시간 동안, 이지현의 인간관계는 정체기에 머물러 있었다. 새로운 사람보다는 익숙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고, 그마저도 가늘게 이어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것에 대한 의욕 없음과 귀찮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남편이 바빠서’, ‘아이 봐줄 사람이 없어서’ 한두 번의 핑계처럼 시작되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넘어서지 못할 장벽이 되었다. 넘어서려고만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장벽은, 편안함 때문에 자꾸만 숨고 싶게 만들었다. 의욕은 넘치는데 늘 불안했던 이십 대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낯설기만 하다. 세계의 모든 것들을 알아가야 할 정복대상으로 생각하는 유은이를 바라보며, 중년의 나를 상상하는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저녁을 다 먹은 후, 유은이와 밤 산책을 했다. 이제 제법 빨리 달리는 유은이는 달리기 시합을 좋아하는데, 오늘도 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물론 자신이 이긴다는 전제하에. 유은이 속도에 맞춰 달려주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에 빠져도 속력이 붙어 유은이보다 앞서게 된다. 그러면 금방 볼멘소리가 나와 버린다. “아니야, 내가 일등~ 엄마는 꼴찌~~”

신경 써서 자진한 이등 기록으로, 달리기 시합을 끝냈다. 다시 유은이 보폭에 맞춰 걷는다. 속도에 맞춰 걸으려다 뒷걸음으로 걸어보았다. 유은이의 걸음과 속도가 제법 잘 맞는다.

5년의 시간이 그냥 지나간 것은 아니었어, 라고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 본다. 이제는 단단해진 울타리에 가지치기할 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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