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혹은 "아빠"가 되어 부모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하며 흔히들 자신의 육아가 세상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것인 양 이야기하게 된다.
육아는 확실히 힘든 것이 맞다.
육아가 아니라면 언제 열나는 아이 옆에서 체온계를 붙들고 꾸벅꾸벅 졸 수 있겠으며, 언제 밥 먹다 말고 옆에서 토하는 아이의 토사물을 손으로 받을 수 있겠는가.
얼마든지 하드코어물로 진행될 수 있는 육아의 세계.
이 육아를 몇 년에 걸쳐 해오며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ㅡ나는 하나 (혹은 둘) 가지고도 이렇게 힘든데 넌 넷이나 어떻게 키우냐는ㅡ것이다.
어떻게 키우긴. 똥 빠지게 키우지.
나는 한 번도, 나보다 적은 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나보다 덜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나는 하나대로 둘은 둘대로 힘든 것이 육아라는 것이며, 이노무 육아라는 것은 거듭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경력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새로운 아기에 적응해야 하는 신입직이 아닌가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넷을 키우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이 할 짓인지 궁금해 보이는 그런 질문들에 대처하는 나의 태도가 겸손 아닌 겸손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넷을 키우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한 번은 놀이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지금의 셋째가 내 인생의 마지막 아기인 줄로만 알았던 그때, 두 돌 즈음의 셋째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 넋이 나간 내게 오고 가며 얼굴 몇 번 본 적 있는 엄마가 다가와 ㅡ아들 셋 엄마시죠?ㅡ하며 묻는다.
네에ㅡ하며 예의 동정과 경외가 섞인 반응을 예상하는 중 아니나 다를까, 얼마나 힘드실까~ 정말 대단하셔요~ 하는 수선들이 쏟아진다.
그러면서 내가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허허 하며 너스레를 떨었는지 ㅡ그런데, 참 밝으시네요.ㅡ라는, 조금은 낯선, 저건 뭐지, 더 웃어제껴라, 더 힘내라는 건가 싶은 한 마디를 더 들었다.
이것은 나더러 웃으라는 건가, 울라는 건가.
하나를 더 낳고서는 더 가관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젖먹이 넷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첫째, 둘째, 셋째를 데리고 역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20분 동안 ㅡ히익, 이 아이들이 다 그 집 아이들 이에요?ㅡ 라는 질문을, 자그마치 세 번이나 들었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하하.
이렇게 양 적으로, 어떤 의미로는 대단해 보이는 다다다둥이 육아를 하며 내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순간들은 다른 엄마들도 겪어본 것이고 특별히 크게, 엄청나게 어려운 것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순간들이 쉴 새 없이, 물밀듯, 자비 없이 쏟아진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남들보다 퍽 많은 아이를 키우고 있다 하여 남들보다 질 좋은 육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아이 키우기에 전문가적인 스킬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아니다.
나라에서 상 줘야겠다느니 나라에 큰 이바지를 한다느니 나를 독립운동이라도 한 듯 추켜 세우는 듯 하지만 그것이 곧이 들리지 않는 나는 분명히 내 몸이 바스라지도록 아이들을 키우지만 세상의 시선에 바짝 움츠러들어있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밤에는,
나란히 누워 자는 아이들의 볼에 부비적 거리다 보면
그러다 슬몃 잠에서 깬 아이가 내 목을 꽉 끌어안는 밤에는,
단단한 색으로 안간힘을 쓰고 그렸던 그림이 물에 번지듯 수채화가 되어 버린다.
그 밤 그렇게 말갛게 색칠된 마음은 더 좋은 엄마로 살고 싶게 만든다.
그렇게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 넷을.
그러니 안쓰러운 눈으로 그만 봐줘요.
웃음이 나서 웃는 거랍니다.
(꽁한 거 아님)